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1552
한자 和順翁主紅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충청낭도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용궁리 799-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건립 시기/일시 1783년연표보기 - 화순옹주홍문 정조의 명으로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1976년 01월 08일연표보기 - 화순옹주홍문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화순옹주홍문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현 소재지 화순옹주홍문 - 충청낭도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용궁리 799-2]
성격 정려
관리자 김성기
문화재 지정 번호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는 화순옹주를 기리기 위해 세운 열녀문.

[개설]

화순옹주홍문화순옹주(和順翁主)[1720~1758]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1783년(정조 7) 정조의 명으로 용궁리 어귀에 세운 열녀문이다. 화순옹주는 예산에 가문의 원찰을 두었던 월성위 김한신(金漢藎)[1720~1758]의 처이며, 조선 왕실 내 유일한 열녀로 알려져 있다. 화순옹주홍문은 1976년 1월 8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화순옹주는 영조의 둘째 딸로 어머니는 정빈이씨(靖嬪李氏)이다. 1732년(영조 8) 영의정 김흥경(金興慶)의 아들인 월성위 김한신과 결혼하였다. 1758년 남편 김한신이 죽자 화순옹주는 곡기를 끊어 월성위의 뒤를 따르려 하였다. 소식을 들은 영조는 “화순옹주월성위가 죽은 뒤로부터 7일 동안 곡기를 끊었다고 하니, 음식을 권하지 않고 좌시하면 어찌 아비 된 도리라 하겠는가?”라며 4일 뒤 화순옹주 방에 거둥하였다. 화순옹주는 영조의 명을 따라 음식을 한입 하다가 토하였고, 이를 본 영조는 한 번 먹은 마음을 돌리지 않으려는 화순옹주의 뜻을 알고 탄식만 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화순옹주는 결국 곡기를 끊은 뒤 14일 만에 사망하였다.

[건립 경위]

화순옹주는 아버지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화순옹주의 정절을 칭찬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은 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다. 이후 1783년 정조가 용궁리 어귀에 정문을 세우고 열녀문이라고 명명하라 명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위치]

화순옹주홍문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는 김정희 선생 고택에서 북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형태]

화순옹주홍문은 200여 평[약 661㎟]의 대지를 조성한 후 낮은 담장을 두르고 정면에 홍문이 세워져 있다. 재실 건물은 주추만 남아 있고, 대문간만 남아 전한다. 대문간은 정면 8칸, 측면 1칸으로, 왼쪽에서 다섯 번째 칸에 문을 내었다. 문의 윗부분에 홍살을 세우고, 붉은 칠을 한 현판을 걸었다. 대문은 완전히 닫히지 않고 약간 열려 있는데, 혼이 드나들게 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현판은 1783년 명정받았으며, ‘열녀 수록대부 월성위 겸오위도총부도총관 증익정효공 김한신 배 화순옹주지문(烈女綏祿大夫月城尉兼五衛都摠府都摠菅贈謚貞孝公金漢藎配和順翁主之門)’이라고 쓰여 있다.

[의의와 평가]

화순옹주홍문은 조선시대 왕실의 유일한 열녀인 화순옹주의 정절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다. 또한 추사 김정희의 가문인 경주김씨 가문과의 연관성도 찾아볼 수 있는 유적으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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