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6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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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自英 |
영어공식명칭 | Jeong Jayeong |
이칭/별칭 | 문장(文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조선 전기 영덕 출신의 문신.
[개설]
정자영(鄭自英)[?~1474]은 1434년(세종 16)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사서(史書)도 널리 섭렵하여 40여년간 사유(師儒)로 칭송받았다.
[가계]
정자영의 본관은 야성(野城)[영덕(盈德)]이며, 시호는 문장(文長)이다. 할아버지는 정태서(鄭台瑞), 아버지는 봉례(奉禮)를 지낸 정도(鄭道)이다.
[활동 사항]
정자영은 1434년 알성문과에 을과 3등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학유를 거쳐 1441년 성균관 박사에 올랐다. 그해 세종이 안질을 앓자 평산(平山) 온천으로 가서 안질에 효험이 있는가를 조사하고 돌아왔다. 세조 즉위 후 박사·직강·사예 등을 역임하고, 1464년(세조 10)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다. 1465년 첨지중추원사·호군을 지냈고, 1466년(세조 12) 보덕을 거쳐 중추부동지사에 올랐다. 이듬해 중추부첨지사로 있으면서 성균관대사성 김예몽(金禮蒙) 등과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의 구결(口訣)을 교정하였다. 1467년 공조참판에 제수되었으며, 1469년(예종 1)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러나 경연에서의 실책으로 호분위사직(虎賁衛司直)으로 좌천당하였다.
[학문과 저술]
정자영은 젊어서 고학으로 공부하여 경학(經學)에 통달하고, 자라서는 학관(學官)이 되어 훈회(訓誨)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구종직(丘從直)과 더불어 세조 앞에서 경전의 뜻[經旨]을 논난(論難)하였는데, 구종직은 매양 영합(迎合)하기를 힘써서 혹은 불교와 도교를 옳다고 하였으나, 정자영은 소견(所見)을 바꾸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상훈과 추모]
1474년(성종 5) ‘문장(文長)’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