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7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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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石述 |
영어공식명칭 | Lee Seoksul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70년 3월 28일 - 이석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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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이석술 영해면 3.1독립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이석술 병곡면 3.1독립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일 - 이석술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이석술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이석술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영해면 3.1독립운동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병곡면 3.1독립운동 |
출생지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묘곡리 540 |
활동지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이석술(李石述)[1870~1919]은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묘곡리 540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19년 경상북도 영덕 지역의 3.1운동은 서울에서 만세시위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지품면 낙평리 예수교 장로교회 조사 김세영(金世榮)과 구세군(救世軍) 참위(參尉) 권태원(權泰源), 병곡면 송천리 예수교 장로교회 조사 정규하(丁奎河)를 비롯해 남여명(南汝明)·남효직(南孝直)·권상호(權相鎬) 등 기독교 교인들에 의해 계획되었다. 기독교인들은 3월 18일 영해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영덕 지역의 토착 향반(鄕班)과 농민들을 규합하였다.
3월 18일 오후 1시경 이석술을 비롯한 시위군중 3,000여명이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장터에 모여 들었다. 이석술은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이석술이 시위군중과 주재소로 갔을 때, 주임순사 스즈키[鈴木鶴次郞]가 해산을 명령하며 태극기를 뺏으려 하였다. 분노한 이석술 등은 곤봉과 돌멩이로 주재소를 때려 부수고 순사부장을 넘어뜨린 후, 2명의 일본 순사의 모자와 칼을 빼앗았다. 이어서 공립보통학교로 행진하여 평소 일제의 정책을 찬양하던 공립보통학교 교사들을 규탄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일본인 소학교·우편소·면사무소를 차례로 공격하였다. 그리고 다시 주재소로 몰려가 건물 안에 걸려 있던 경찰복을 모두 찢어버렸으며,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빼앗아 파기하였다.
오후 2시경 이석술과 시위대는 병곡면 병곡리로 가서 병곡면 3.1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석술과 시위 군중들은 병곡주재소·병곡면사무소 등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평해(平海)에서 증원된 일본 헌병 3명과 주재소 순사가 합세하여 총을 겨누며 위협하자, 희생을 염려한 정규하의 설득으로 오후 7시경 해산하였다.
3월 19일에도 만세시위운동은 이어졌다. 그러나 오후 5시경 대구(大邱)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보병 80연대로부터 장교 이하 17명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헌병들과 합세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해산과정에서 이석술이 총탄에 맞고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