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8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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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重命 |
영어공식명칭 | Kim Jungmyeong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진호 |
출생 시기/일시 | 1886년 5월 8일 - 김중명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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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일 - 김중명 지품면 3.1독립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20년 7월 29일 - 김중명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8년 - 김중명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일 - 지품면 3.1독립운동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황장리 302 |
활동지 | 원전동시장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원전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기독교 북장로파 영수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중명(金重命)은 1886년 5월 8일에 태어났으며, 거주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황장동 302이다.
[활동 사항]
1919년 2월 말경 고종의 국장을 참례하기 위해 경상북도 영덕군에서 권태원(權泰源)·정규하(丁奎河)·남세혁(南世爀)·남효직(南孝直)·권상호(權相鎬) 등이 상경하였다가 3월 1일 일어난 3.1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귀향하였다. 또한 서울 성서학원 학생 김응조(金應祚)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지품면 낙평동으로 귀가하였다. 그리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려고 상경했던 낙평동 북장로파 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이 학교가 휴교를 당하여 대구를 거쳐 3월 11일경 귀가하였다. 김세영은 3월 12일 낙평동 교회에서 권태원을 만나 독립만세운동의 전개 상황을 전하였으며, 병곡면 송천동 교회의 정규하에게 영덕에서 독립만세를 외치자고 권유하였다. 이어 영덕면의 강우근(姜佑根)·김우일(金愚一)에게 김혁동(金爀東), 지품면 원전동의 김태을(金太乙)과 황장동의 주명우(朱明宇)에게 김중명(金重命)을 보내어 독립만세를 권유하였다.
3월 16일경 북장로파 영수(領袖)였던 김중명(金重命)[1886~1920]은 김세영의 권유를 원전동 교회의 집사(執事)인 주명우에게 전달하였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일제에 불만을 갖고 있던 주명우는 3월 11일경 『매일신보』 보도 기사를 통하여 서울 기타 전국 각지에서 ‘조선독립시위운동’이 시작되었음을 알고 독립운동을 일으킬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김중명의 이야기를 듣고 독립만세를 실행에 옮기기로 다짐하였다. 주명우는 3월 19일 아침 지품면 원정동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결심하고 종이 깃발을 만들어 ‘대한독립만만세(大韓獨立萬萬歲)’라고 적었다.
3월 19일 오전 11시 30분경 주명우는 교회 신자 14~5명에게 독립만세를 권유하였다. 김중명 또한 황장동에서 약 3㎞ 정도 떨어진 원전동 시장으로 가던 중 주명우를 만나 만세시위에 가담하였다. 정오에 이르자, 주명우·김중명 등이 지품경찰관주재소 앞에서 군중들에게 독립 연설을 함으로써, 지품면 3.1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주명우가 먼저 군중들을 향해 “한국 독립의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 죽을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한다.” 또 “죽기를 결심하고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라고 연설하였다. 이에 김중명도 “이는 조선 독립의 기회이다.”라고 연설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쳤다. 주명우와 김중명의 연설이 이어지는 가운데 교회 신자들뿐만 아니라 시장 군중들도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그러자 주재소 일경들이 주도 인사를 체포하고 독립만세를 제지함으로써 군중들은 해산하였다.
일경에 체포된 김중명은 4월 19일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하였지만, 5월 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취소에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일제의 판결에 상고하였으나 6월 5일 고등법원에서 상고를 기각하여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상훈과 추모]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