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돌석 의병장 설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1223
한자 申乭石義兵將說話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은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2년 - 「신돌석 의병장 설화」 『영덕군지』에 수록
관련 지명 고래산 -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상원리 지도보기
채록지 「신돌석 의병장 설화」 채록지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지도보기
채록지 「신돌석 의병장 설화」 채록지 -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지도보기
성격 설화|전설
주요 등장 인물 신돌석|아버지|친척
모티프 유형 패배한 영웅|아기장수 전설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에서 의병장 신돌석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신돌석 의병장 설화」는 근대 개항기 의병장 신돌석(申乭石)[1878~1908]에 대한 인물 전설이다. 영덕군에는 신돌석 의병장과 관련하여 신돌석의 출생, 수련, 행적, 죽음 등 다양한 설화가 전해진다. 일부는 역사적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도 있고, 일부는 역사적 사실과 허구가 섞여서 형성된 것도 있다. 역사적인 인물이 근대적 인식에 의해 설화로 형상화된 것이다.

[채록/수집 상황]

「신돌석 의병장 설화」는 2002년 영덕군에서 발행한 『영덕군지』에 수록되어 있는데, 『영덕군지』에는 채록 경위가 밝혀져 있지 않다.

조동일의 『인물 전설의 의미와 기능』에 수록된 다수의 신돌석 관련 설화는 1977년 영해면축산면에서 채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

영덕군에서는 신돌석 의병장에 대해서 많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1. ‘신 의병장의 출생 신분’

신 의병장은 보통 ‘신돌석’이라고 하는데, 원래 이름은 돌선(乭先)인데 사람들이 돌석이라 하였다고 한다. 관명은 태호(泰鎬)이며, 옛날 영해읍 내에서 아전 노릇하는 신씨라는 뜻인 읍신(邑申)이라 한다. 또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지낸 분의 자손이 이곳에 와서 정착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여간 그 집에서 신돌석이 태어났는데, 신돌석이 순국한 후 당시에는 패가(敗家)가 되다시피 하였으나 광복이 되고 나서는 괜찮아졌다고 한다.

2. ‘신 의병장 고함에 나무가 뿌리 뽑히다’

옛날 영덕군 고래산에 집터만큼 큰 바위가 있었다. 바위 아래 방처럼 생긴 굴이 있었는데, 신돌석의 부모가 그곳에서 촛불을 켜고 매일같이 기도를 해서 신돌석을 낳았다고 한다. 신돌석은 날 때부터 골격이 튼튼하고 남달랐다. 겨우 대여섯 살 때 맨주먹으로 미친 개를 때려잡았다고 하는데, 큰 나무나 고을의 객사를 훌쩍훌쩍 뛰어넘고 다닐 정도로 보통이 아니었다. 하루는 신돌석이 일월산(日月山)에 가서 공부를 하다가, 공부가 잘 되지 않아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신돌석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신돌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놈, 무엇이냐?” 하고 고함을 질렀다. 사실 그것은 호랑이가 아닌 큰 나무였는데, 신돌석의 고함소리와 기에 눌려 큰 나무가 뿌리째 뽑혔다고 한다. 이처럼 신돌석은 자라면서 장대한 체격에 걸맞게 용력(勇力)도 비상해졌다. 이 사람이 바로 훗날 평민 최초 의병장으로 이름을 널리 떨친 민중의 영웅, 신 의병장 신돌석 장군이다. 신돌석 장군은 의병들을 이끌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 게릴라전을 펼쳐 왜군을 물리쳤다. 태백산, 소백산, 일월산, 백암산 등 백두대간의 험악한 준령을 모두 누비고 다녔다. 신돌석 장군의 기개와 용맹이 마치 호랑이 같다 하여,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3. ‘신돌석 의병장의 줄다리기’

한번은 영해 사람들이 벌영 냇가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줄이 한쪽 편으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그것을 본 신 의병장이 줄이 끌려가는 반대쪽으로 가서 줄을 당겼더니 곧바로 반대편 쪽이 이기게 되었다고 한다.

4. ‘신 의병장이 호랑이를 쫓다’

미친 개가 나타나면 보통 사람들은 건드리지 못하는데, 신 의병장은 미친 개를 보면 꼬리를 잡아 멀리 던져 버리곤 하였다. 하루는 농민들이 모내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어어어” 하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돌아보니 신 의병장이 집채만 한 호랑이를 쫓고 있었다고 한다.

5. '신돌석과 천서'

신돌석 장군은 영덕군 축산면 도곡동 출생이다. 어디서 천서(天書) 한 권을 구해서 그 책으로 수련을 하고 있었는데, 아직 달통(達通)할 정도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래서 신돌석은 매일 밤 집을 나가 연습을 하였다. 하루는 밤마다 집을 나가는 아들을 수상하게 여긴 신돌석의 아버지가 아들의 뒤를 밟았다. 따라가 보니 신돌석고래산을 풀쩍 뛰어넘고 있었다. 신돌석의 아버지는 집안에 이런 장사가 나면 집안이 망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집에 돌아와 신돌석이 공부하던 책을 찾아 불태웠다. 고래산에서 훈련을 하고 온 신돌석은 책을 찾지 못하였고, 수련도 중도에 그만두게 되었다.

6. '신돌석의 죽음'

1905년 한일합병이 되어 왜적이 조선에 건너왔다. 조선인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을 조직해서 활동하였고, 일본인들은 의병을 생포하기 위해 상금을 내걸었다. 신돌석 의병장의 위세도 대단하여 일본인들은 신돌석 의병장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때 신돌석의 친척 되는 사람이 상금을 노리고 신돌석에게 접근하였다. 독한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신돌석에게 먹이니 신돌석은 곯아떨어졌다. 그러자 두 사람이 떡메와 도끼를 들고 신돌석을 때렸다. 신돌석이 워낙 힘이 장사라 벌떡 일어나 벽을 치고 뛰쳐나갔지만 끝내 죽었다. 신돌석을 생포해 오라고 했는데 신돌석이 죽었으니 그 친척들은 포상금도 받지 못하였다. 아까운 사람만 죽인 것이다.

[모티프 분석]

「신돌석 의병장 설화」의 주요 모티프는 '패배한 영웅'과 '아기장수 전설'이다. 신돌석은 지체가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용력이 뛰어났고, 열아홉에 항일 의병에 가담한 후 의병장으로 대단한 활약을 했으나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비장한 죽음을 맞이하였기에 패배한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신돌석 의병장 설화」는 아기장수 전설과도 연결된다. 백성의 집안에 장수가 나면 부모조차도 그가 역적이 될 것이라 두려워하고 직접 자식을 죽여 버리는데, 신돌석의 아버지가 아들의 천서를 숨겨 버리는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의 이야기이다. 장수가 태어나도 세상을 뒤집어엎을 수는 없다는 전제는 민중의 항거가 거듭 패배한 역사적 경험의 집약이다. 신돌석 설화의 전승자들은 이러한 설화를 통해 신돌석 의병장의 비장한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행적에 대해 깊은 존경과 공감을 나타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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