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1330 |
---|---|
한자 | 民衆-自畵像-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은정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에서 꾀쟁이 하인 유형 인물인 방학중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
[평양에는 김선달, 영덕에는 방학중]
평양에 김선달이 있다면 영덕에는 방학중이 있다. 김선달과 방학중 외에도 서울의 정수동, 영일의 정만서 등 비슷한 유형의 인물들이 우리 설화 속에 존재한다. 이들은 사기꾼이나 건달형 인물, 일찍부터 전 세계에 널리 분포한 인물형인 트릭스터(Trickster)[어떤 경계에서 인간 사회가 정하는 모든 범주나 개념을 초월하는 인물], 꾀쟁이 하인 등으로 불리는데, 비슷한 유형으로 묶이기는 하지만 같기만 한 것은 아니다.
김선달은 대동강 물을 팔아먹기 위해서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시간과 자본을 투자하는 상당히 지적이고 세심한 인물로, 평양 같은 큰 고장에 흔히 있었을 법한 투기꾼의 모습이다. 정수동은 중인이지만 서울의 양반 세도 가문에 출입하면서 재주를 팔았던 인물이다. 정만서는 지닌 것은 없어도 아주 당당하고 언변으로라도 장터를 쥐고 흔들었다. 그러나 방학중은 이러한 유형의 인물 중에서 사회적 지위가 가장 낮고 보잘것없는 인물이다.
방학중은 ‘꾀쟁이 하인’ 유형의 대표적인 인물로, 방학중의 신분은 상전을 모시는 하인이다. 방학중이 선보이는 속임수나 장난도 거창한 것이 없고 대부분 사소한 것들이어서 엄청난 돈을 벌지도 못하고 그날 먹고 마실 것이나 얻는 정도이다. 방학중은 어떤 인물보다도 밑바닥 인생이지만 자기의 처지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며, 주어진 상황을 거부하는 데서 방학중 이야기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그래서 경상북도 영덕 지방의 인물 중 다른 누구보다도 인기가 있고, 다른 어떤 인물에 관한 이야기보다 많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영덕에 전해지는 방학중 설화]
오월쯤 되었을 무렵, 방학중이 길을 가다가 배가 고파 어디 뭐 얻어먹을 게 없나 궁리를 하고 있었다. 어느 집에 가니 여인이 아기를 업고 떡보리 디딜방아를 찧고 있었는데, 방학중은 그 떡보리가 먹고 싶어졌다. 여인에게 다가가 더워서 힘이 들겠다고 하며 자기가 아기를 업고 방아 찧기를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여인이 방아를 다 찧자 방아를 들어 보라고 하고는 떡보리를 들어내고 확에 아기를 넣고 도망갔다. 방아를 놓으면 아기가 다치니 여인은 방학중을 쫓아가지도 못하였다.
방학중이 그 떡보리를 좀 먹고 나머지는 들고 가다가 꿀장사를 만났다. 꿀을 산다며 떡보리 움푹 들어간 곳에 꿀을 붓게 하였다. 그러고는 꿀 값이 얼마인지 물어 보더니 비싸서 못 사겠다고 하며 꿀을 도로 부어 버렸다. 그 사이 떡보리에 꿀이 묻었고 방학중은 돈을 내지 않고 꿀 묻은 떡보리를 먹게 되었다.
하인 방학중은 주인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면서 마부 노릇을 하였다. 주인이 술을 받아 오라고 하자 방학중이 술을 받아 오는데 술에 손을 넣어 휘휘 젓고 있는 것이었다. 주인이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오다가 재채기를 하는 바람에 술에 코가 빠져서 그것을 일일이 건져 내고 있다고 하였다. 주인이 더러워 안 먹겠다고 하니 자기가 그 술을 먹었다. 다른 날은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우며 서울은 생눈을 빼먹는 곳이니 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방학중은 말을 지키기는커녕 말을 팔아먹고 말고삐만 쥐고 있었다. 돌아온 주인이 말을 어쨌느냐고 추궁하자 “아이쿠, 말이 없어졌네요. 나리가 서울은 생 눈알을 빼먹는다고 하여서 눈을 빼 갈까봐 눈을 꼭 감고 있었더니 그새 말을 끌고 갔네요.”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화가 난 주인이 방학중의 등에다 이놈을 죽여 없애라는 글을 써 붙여 집으로 내려 보냈다. 도중에 스님을 만난 방학중은 자기 등에 어떤 글자가 쓰여 있는지 알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스님이 사실을 이야기해 주자 그것을 뜯어내고 그 대신 주인의 딸과 결혼시키고 논도 주어 잘 살게 해 주라는 내용으로 다시 써서 붙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방학중은 주인집 딸과 결혼하게 되었다.
3. 「이천 냥에 변소를 빌린 방학중」
평양에 봉이 김선달이 있다면 영덕엔 방학중이 있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180년 전, 오십천의 입구에 있다 하여 ‘강구’라는 지명을 얻은 곳, 그리고 그중 물이 많다는 ‘하저동’에서 태어난 인물이 있었다. 바로 조선 팔도를 떠돌며 한문은 물론 문장에 능하고 언변이 좋아 서울의 정수동, 평양의 김선달, 영일의 정만서와 함께 조선의 4대 해학가로 통한 방학중이 바로 그이다.
언젠가 방학중이 한양에 갔던 날이었다. “아이고 배야, 아이고...” 갑자기 배가 아팠던 방학중은 어느 양반집 문을 급히 두드렸다. “게 아무도 없소?” “뉘신데 이리 남의 집 문을 두드리시오?” “몹시 급해서 그러니 통시[변소] 좀 씁시다.” 그러나 안주인은 방학중의 행색을 보더니 잡인은 함부로 들일 수 없다며 단박에 거절하였다. 천 냥을 주겠다고 하였으나, 안주인은 안 될 일이라고 하였다. 너무 급했던 방학중은 이천 냥을 주겠다고 다시 제의하였다. 그 말에 솔깃해진 안주인은 이천 냥을 받고 잠시 통시를 이용하라고 허락하였다. 시원하게 일을 본 방학중, 그런데 아무리 생각하여도 안주인이 괘씸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방학중은 소리쳤다. “내 이천 냥을 냈으니 그만큼 통시를 사용하고 나가겠소.” 남편 퇴청 시간은 다가오고 천하 잡놈 하나가 통시에 들어앉아 나올 생각을 안 하니 안주인은 몹시 조급해졌다. “천 냥을 줄 테니 어서 나오시오.” 그러나 방학중은 나오지 않았고 안주인은 더욱 다급해져서 이천 냥 모두 돌려줄 테니 나오라고 하였다. 역시 방학중은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결국 안주인은 삼천 냥을 주고서야 방학중을 통시에서 나오게 만들었다. 한양 사람이자 양반을 방학중은 이런 식으로 골려 주었다.
4. 「송절(松節)」
전라도 전주에 유명한 기생이 있다는 말을 들은 방학중이 그녀를 한번 만나보기 위해 길을 떠나 저물녘에 기생 송절의 집에 당도하였다. 석양을 등지고 들어오는 남루한 옷차림의 방학중을 본 송절이, “저건 도대체 무엇이냐? 신 돌려 내쳐라,”라고 하였다. 방학중이 이 말을 듣고 “네 이름이 ‘절’이라고 하였지. 내 이름은 ‘중’이로다. 산고곡심(山高谷深) 저문 날에 신 돌려 어딜 가랴? 동자야, 가사 장삼 받아 상방에 걸어라. 내가 오늘밤 자야 할 ‘절’이 이 ‘절’이니라.” 방학중의 문자를 들은 송절은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버선발로 뛰어 나와 방학중을 모시고 들어가 하룻밤을 잘 지냈다. 방학중은 이러한 솜씨로 당대 일류 기생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5. 「술맛 보기」
방학중이 친구들과 길을 가다가 주막집에 이르러 주막의 술맛이 좋으면 마시고 가기로 하였다. 술맛을 보아 수염을 내리 쓰다듬으면 맛이 좋은 것, 치켜 쓰다듬으면 나쁜 것으로 신호를 정하였다. 모두 몇 푼씩 돈을 내걸었고 방학중이 그 돈을 들고 들어가 미리 술맛을 보기로 하였다. 방학중이 한 잔 마시고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수염을 치켜 쓰다듬고 또 한 잔 마시고는 또 그 시늉을 하고 계속 이렇게 하여 혼자 대취(大醉)하였다고 한다.
6. 「하던 방석(方席)」
방학중이 선비들을 따라 서울로 가는데, 길가 어느 집에서 여인이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친구들이 방학중을 떼어 놓으려고 “저 여자와 동침할 수 있겠나?” 라고 하며 그렇게 하면 같이 데려가 주겠다고 하였다. 방학중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그 집에 들어갔다. 방학중이 여인에게 물을 청하여 마신 다음, 먼저 자기의 성이 ‘내’가라고 소개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동네에서는 가위를 ‘씹씨개’, 방석을 ‘하던 방석’이라고 부른다고 알려준 후 가위를 방석 밑에 숨긴 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위를 찾지 못한 여인이 뒤쫓아 오면서 “내 서방, 내 서방, 씹씨개 어쨌소?” 하고 소리를 지르자 방학중은 태연히 뒤돌아보면서 “하던 방석 밑에 있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친구들은 방학중이 여인과 동침하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7. 「방 안 낚시」
방학중이 집을 내팽개치고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다. 집이 어찌나 가난했던지 지붕도 제대로 이지 못하여 여름에 비가 몹시 퍼붓자 방 한복판에 물이 가득 고였다. 방학중과 아내가 한복판 고인 물을 피해 양쪽 구석에 앉았다. 방학중은 방 한쪽 구석에서 긴 담뱃대에 실과 바늘을 묶어 드리우고는 낚시를 한다고 하였다. 그 모습을 본 아내가 짜증을 내면서 나무라자 방학중이 “배만 있으면 당장 타고 가서 죽여 버릴 텐데.”하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8. 「겨울에 삼베옷 입는 방학중」
어느 추운 겨울날, 어떤 사람이 명주옷을 입고 벌벌 떨고 있었다. 방학중이 그 사람을 보고 왜 그렇게 떠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추워서 떤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방학중이 큰소리로 "아, 우리처럼 삼베옷을 입고 있으면 바람이 옷감 사이로 지나가서 하나도 안 춥지."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명주옷 입은 사람이 방학중과 옷을 바꿔 입자고 해서 그렇게 하였다.
[방학중이라는 인물의 성격]
방학중 설화 속의 방학중은 먹고 입고 자고 사랑하는 일상적 욕망을 거리낌 없이 추구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타인과 세상에 피해를 주고 혼란을 일으키지만 그것을 괘념치 않고 오히려 그런 점을 즐긴다. 상전을 속이는 하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방학중이 속이고 놀리는 대상은 남녀노소와 상하를 가리지 않는다. 방학중은 우리의 모든 고정관념을 공격함으로써 세상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데 기여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방학중, 떡보리, 꿀」의 방학중은 철저한 이기주의자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인물이다. 방학중 때문에 여인은 애써 찧은 떡보리를 다 빼앗기고 아기까지 죽게 할 뻔하였고, 꿀 장사는 큰 손해를 입었다. 이처럼 방학중은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조차 하지 않고 자신의 충동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 윤리를 따지지 않는다.
또한 방학중은 통념과 도덕률을 무시하며 기존 질서를 부정하는 인물이다. 「이천 냥에 변소를 빌린 방학중」에서 방학중은 기지(奇智)로 상황을 역전시킨다. 변소를 비워 주지 않고 버티고 있으면서 자신을 무시하였던 서울 양반집 부인을 골탕 먹이고 돈까지 받아낸 것이다. 이러한 방학중의 행위는 통념을 크게 벗어난 것이면서 기존의 질서를 전복(顚覆)하는 일이다. 「꾀쟁이 하인, 방학중」에서도 방학중은 하인이면서 온갖 꾀로 주인을 속이고, 결국 주인의 딸과 결혼까지하여 신분 질서에 균열을 가한다.
방학중은 자신의 열악한 처지를 낙관적으로 전환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방학중은 가난이나 추위, 타인의 멸시 등 사람이 일상적으로 겪는 비관적 상황에 연연하지 않는다. 「방 안 낚시」에서 방에 빗물이 흥건한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낚시를 드리우고, 그런 자신을 타박하는 아내에게 화를 내면서도 분위기를 절망적으로 인식하지는 않는다. 「겨울에 삼베옷 입는 방학중」에서도 방학중은 한겨울에 삼베옷을 입고 있지만 기죽지 않고 명주옷을 입고 떠는 사람을 나무라고, 삼베옷의 단점을 장점으로 뒤집어 명주옷과 바꾸어 입는다.
그리고 방학중은 말로써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인물이다. 행동보다는 말을 우선시하고 인간관계에서 말을 유용한 무기로 구사한다. 「하던 방석」에서 방학중은 특별히 행동이 요구되었는데도 그 행동을 하지 않고 말만 하여 소기의 효과를 거두고 목표를 성취한다. 「송절(松節)」에서는 수사적 능력으로 자기를 천대하고 얕잡아보던 기생을 사로잡아 욕망을 충족시키는 동시에 자존심도 지켜낸다. 이렇듯 방학중에게 말은 욕망 충족과 문제 해결의 수단이 된다.
[연극 ‘꾀쟁이 방학중’]
경상북도 영덕군에서는 방학중에 대한 설화를 소재로 한 창작 연극 ‘꾀쟁이 방학중’을 제작하여 2015년부터 공연하고 있다. ‘꾀쟁이 방학중’은 방학중이 한양 가는 최진사를 따라나섰다가 기발한 재치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하고 최진사의 딸과 혼례를 한다는 내용이다. 영덕군은 2013년 10월 영덕군과 영덕문화원이 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와 함께 개최한 ‘천하잡보 방학중의 해학과 풍자’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을 통해 방학중이라는 인물의 면모를 다각도로 조명하였다. 이를 통해 방학중 설화를 영덕만의 독특한 콘텐츠로 키우는 방안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영덕군은 안동하회탈춤 전승자이자 연출가인 황영호를 초빙해 직장인, 가정주부, 학생 등 지역민들을 배우로 모집하고, 노래와 율동, 그리고 연기를 지도해 2015년 연말 ‘꾀쟁이 방학중’을 처음으로 무대에 올렸다. ‘꾀쟁이 방학중’ 연극단은 전문 연기자가 아닌 순수 일반인들로 구성되어 더 의미가 깊다. 이들은 매년 연말이나 연초에 정기공연을 하고, 1년에 4회 정도 지역 축제에도 참가한다. 2015년 첫 공연부터 계속 공연에 참가하고 있는 한 농업인은 “영덕만의 고유한 콘텐츠를 공연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해가 거듭될수록 높아지고 있다.”고 하였으며, 연극에 참여하는 한 주부는 “평범한 주부였던 내가 이렇게 무대에 오를 수 있다니 신기하다.”며 “좋은 추억이면서 동시에 묻어 놨던 꿈을 되찾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고 말하였다. 단원들은 물오른 연기력으로 익살스러운 몸짓과 해학 넘치는 연극 한마당을 펼쳐 영덕군민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황영호 감독은 "영덕만의 좋은 문화 콘텐츠와 배우들의 지역 사랑 그리고 열정 덕에 지금까지 발전해 오고 있다. 지역 사회와 영덕군의 보다 체계적이고 전폭적인 후원과 지원이 절실한 시점이다."라고 하였다. 꾀쟁이 방학중’ 연극단은 보다 체계적이고 발전적인 형태를 갖춰 나가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 오고 있다. 방학중 콘텐츠에 대한 영덕군 각계각층의 관심과 노력이 축적된다면 ‘꾀쟁이 방학중’이 영덕을 넘어 전국적인 공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민중의 자화상]
서울이나 평양은 남다른 인물에 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산출할 만큼 문화가 발달된 큰 고장이다. 그런데 경상북도 동해안 지방에서 같은 양상의 새로운 이야기가 나타났다는 것은 상당히 문제적이다. 방학중 설화가 생성되고 계속 전승된 것은 물론 재미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조금 더 깊은 층위에서 본다면 기득권층을 상징하는 상전을 골탕 먹이는 것으로 기성 체제를 뒤엎고 싶은 하층민의 염원을 표현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방학중은 기득권층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과 안위를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속이고 희생시키며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사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방학중은 우리의 모든 고정관념을 공격함으로써 세상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데 기여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영덕 사람들은 방학중에 대한 설화를 다양하게 전승하면서, 방학중이 세상과 좌충우돌하며 기존 질서를 흐트러뜨리고 어떤 눈치도 보지 않고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모습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방학중은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공동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는 민중의 영웅이 아니라 민중의 모습 그대로인 민중의 자화상이다.
방학중은 19세기 무렵 영덕군 강구면 하저리에서 출생했다고 하고 남정면 원천리 지푸심골에 묘가 있다. 영덕의 인물 전설 중 방학중에 대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방학중에 대한 전승자들의 태도도 다양하다. 영덕 사람들이 방학중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와 별개로 방학중은 영덕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지금도 말썽 피우는 아이나 곁말 잘 하는 사람을 보면 “이 방학중 같은 놈아!” 라고 할 만큼 영덕 사람들에게 방학중은 친근하면서도 각별한 존재이다. 창작 연극을 통해 부활한 방학중은 지금도 영덕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