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13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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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公壽 |
영어공식명칭 | Nam Gongsu |
이칭/별칭 | 치도(穉道),영은(瀛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793년 - 남공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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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40년 - 남공수 김해도호부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871년 - 남공수 이필제의 난 창의 |
몰년 시기/일시 | 1875년 - 남공수 사망 |
출생지 | 경상도 영해도호부 괴시리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
거주|이주지 | 영덕괴시리영은고택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호지마을1길 34[괴시리 357] |
거주|이주지 | 침수정[괴시리]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사진길 121[괴시리 5] |
유배|이배지 | 김해도호부 - 경상남도 김해시 |
유배|이배지 | 금릉 - 경상북도 김천시 |
묘소|단소 | 벽수동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영양 |
[정의]
조선 후기 영덕 출신의 학자.
[개설]
남공수(南公壽)[1793~1875]는 류치명(柳致明)의 문인이며, 문집으로 『영은집(瀛隱集)』을 남겼다.
[가계]
남공수는 경상도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 괴시리(槐市里)[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치도(穉道), 호는 영은(瀛隱)이다. 아버지는 남일운(南一運)[남경원(南景元)], 어머니는 박평(朴玶)의 딸 무안박씨(務安朴氏), 할아버지는 남식만(南式萬), 증조할아버지는 생원(生員) 남준형(南峻衡)이며, 부인은 백회문(白晦文)의 딸 대흥백씨(大興白氏)와 이인옥(李寅沃)의 딸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활동 사항]
남공수는 1793년(영조 17) 류치명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남성원(南性元)·신석우(申錫愚)·이경재(李景在) 등과 교유하였다. 10세 때 영해도호부사(寧海都護府使) 김희주(金熙周)가 관정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문예를 겨루게 하였는데, 남공수가 두각을 나타내었다. 김희주는 붓과 먹을 상으로 내렸지만, 남공수는 한 차례 거절한 후 단지 붓만 받았다. 과거 공부를 정밀하게 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에 고향에서 학문 연구와 향촌 사회 활동에 힘썼다. 1840년(헌종 6) 영해향교(寧海鄕校)에서 유림 간의 갈등이 발생하였는데, 남공수가 책임을 물어 김해(金海)에 잠시 유배되었다. 1854년(철종 5)에는 영해향교 도유사(都有司)로 있으면서 강학소(講學所)와 서별고(西別庫)를 설립하였다. 1857년에는 침수정(枕漱亭)을 건립하고 소요하였다. 당시 영해도호부사는 천주교도 남종삼(南鍾三)이었는데 침수정에서 남공수와 자주 만났고, 서신 왕래로 이어 나갔다. 훗날 천주교 박해로 남종삼이 체포되자, 남공수도 연루되어 금릉(金陵)으로 잠시 유배되었다.
1862년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거행하고, 향약과 백록동규(白鹿洞規)를 강하였다. 1871년 동학교도 이필제(李弼濟)의 무리가 부성(府城)으로 쳐들어와 수령을 죽이는 일이 일어났다. 남공수는 이필제 무리를 토벌하기 위해 의병을 모았으나, 이미 물러간 후였다. 1873년에는 고을의 여러 유림들과 향사당(鄕射堂)에 모여 읍지를 수정하였다. 1875년 왕자 탄생을 기념하여 80세 이상의 사서인(士庶人)에게 수직(壽職)을 제수하였다. 자제들이 수직을 받으러 도성으로 가려했지만, 남공수는 경계하는 시를 지어 주고는 나아가지 않았다.
[학문과 저술]
남공수의 문집으로는 7권 4책의 『영은집』이 전한다. 잡저(雜著)의 「장서계(藏書誡)」는 후손들에게 장서의 중요성과 올바른 방법을 경계한 것이고, 「야담기문(野談記聞)」은 평범한 사람들의 기이한 행적을 엮은 것이다. 그 외에도 『한묵초결(翰墨抄訣)』, 『계훈촬요(溪訓撮要)』, 『금릉일록(金陵日錄)』 등을 저술하였다.
[묘소]
남공수의 묘는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 벽수동(碧水洞)에 있다. 김도화(金道和)가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