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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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奉詔院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신평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공포 시기/일시 | 1421년 이전 - 봉소원 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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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 시기/일시 | 1421년 이전 - 봉소원을 조선과 명의 양국 사신 행차에 이용 |
폐지 시기/일시 | 1759년 - 봉소원 쇠퇴 |
관할 지역 | 봉소원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신평리 |
[정의]
조선 전기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신평리에 있었던 숙식 제공을 위한 공공시설.
[개설]
봉소원은 조선과 명나라 양국의 사신(使臣) 행차에 이용되었던 국가 경영의 여관이다. 사신이나 공무로 인한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한 시설로 사용되었다. 조선 전기 주요 교통로에서 활발히 이용되었다가, 조선 후기 당진포항이 이용되면서부터 폐지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역과 역 사이의 교통의 요충지 또는 인가가 드문 곳에 설치하여 공무로 인한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고자 국가에서 직접 경영하였다.
[관련 기록]
『여지도서(輿地圖書)』 덕산현 방리조에 등장하는 현내면(縣內面) 원리(院里)가 봉소원을 배후로 형성된 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원리는 편호 72호, 남 77명, 여 95명으로 상당히 큰 규모의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院里自官門南距五里編戶七十二 戶男七十七口女九十五口].
그 외 봉소원 관련 자료로 ‘광성부원군 김만기(金萬基)에게 충청도 덕산현의 가야사 위전(位田) 7결 34부 6속, 봉용원 위전 32부 7속, 관둔전 23부 9속, 합 전답 7결 11부 2속 등을 의례에 따라 절급하기를 청하는 호조(戶曹)의 계’가 있다.
[내용]
봉소원은 명나라의 수도가 남경에 있던 시기[1421년 이전]에 조선과 명나라의 사신 행차에 이용되었다. 명나라 초기 수도는 남경으로 이때 사신은 양자강의 남쪽에서 가장 근거리인 안흥창을 이용하였다.
봉소원이 있던 예산군 덕산면 신평리는 원효봉, 월봉 등의 낮은 산지에 간간히 농경지가 조성된 마을이다. 마을 북동쪽으로 덕산천이 흐르며 옥계저수지가 있다. 신평리의 자연마을로는 봉정이, 평리, 신평 등이 있다. 이 중 봉정이는 으뜸 마을로, 조선시대 급천역의 봉소원이 있었다 하여 지금까지 불리는 이름이다.
봉소원이 있던 일대는 삽교천이 만입하며, 덕산과 삽교의 경계에 이르는 곳이다. 봉소원터가 확인되는 봉정이는 현재 덕산과 삽교의 경계에 맞닿아 있다. 특히 봉정이는 시기에 따라 덕산과 삽교의 행정 경계를 오가는 지역이었다. 일찍이 이 지역의 역원은 ‘봉소원-삽교-일흥역-노계리 석교-신례원-신창’ 길이 형성되었는데, 이 길이 현재 해미에서 예산에 이르는 국도45호선으로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로 연결된다.
봉소원은 1759년(영조 35)을 기점으로 쇠퇴하여 주막거리로만 명맥을 유지하였다. 덕산현 인근의 주막거리로 행인과 보부상이 드나들어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변천]
사신은 안흥-태안-서산-해미를 거쳐 덕산 한티고개를 넘어 봉소원에 유숙하였다. 그러다가 태안의 안흥항 대신 홍성 결성의 ‘안흥정’이 새로운 교통로로 이용되면서 결성-덕산-수덕고개를 거쳐 다시 봉소원으로 이르는 길이 이용되었다. 이후의 경로는 봉소원-삽교-일흥역-노계리 석교[오가면 오촌리]-신례원-신창을 거쳐 서울로 향하였다. 그러다 당진포항이 이용되면서부터 봉소원이 폐지되고 대신 예산의 신례원길이 이용되었다. 즉 당진포-채운교-당진읍-노계리 석교-신례원-신창을 거쳐 서울로 향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역원은 조선시대 교통기관이자 통신기관의 역할을 하며 공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정치적,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기관이었다. 봉소원은 충청 지역에서 덕산 지역의 교통 관계와 위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