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7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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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地方官 |
이칭/별칭 | 수령,현감,군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충청남도 예산 지역에 존재했던 예산·덕산·대흥 등 3개 군현의 행정 책임을 맡은 군수·현감.
[개설]
고려시대의 행정구역 개편 과정에서 많은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나 완전하지 못하였고, 조선 건국 후에야 전국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부임할 수 있었다. 예산군에는 예산·대흥·덕산 3개 군현이 존재하였는데, 모두 고려 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조선 건국 후 1413년(태종 13)에 비로소 현감을 파견하였다. 각 군현의 읍격 승강에 따라 현감 또는 군수가 배치되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지방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흥군, 덕산군, 예산군을 통합해 ‘예산군’을 설치함과 동시에 지방관 역시 현대식 행정제도로 바뀌게 되었다.
[예산현의 지방관]
예산현은 1018년(현종 9)에 천안부(天安府)에 붙였다가 후에 감무관을 두었는데, 조선 건국 후 1413년에 현감이 파견되었다. 그리고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승격하여 군수를 두었는데 1914년 대흥군과 덕산군을 통합하여 예산군을 설치하면서 12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예산현 환적(宦蹟) 조에는 1554년(명종 9)부터 1765년(영조 41)까지 현감의 부임·퇴임 연월일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퇴임 사유, 선정비의 유무 등이 부기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예산현에 파견된 지방관의 품계는 음관(蔭官) 6품직의 관속이었고 그 휘하에는 좌수 1인, 별감 2인, 군관 30인, 아전 20인, 지인 12인, 사령 15인, 관노 11인, 관비 7인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관찬 사료를 통해 예산현감은 1432년(세종 14)에 부임한 최순민(崔舜民)부터 1888년에 부임한 윤상구(尹相耉)까지 129인이 확인된다. 이 중 1471년(성종 2)에 예산현감이 된 유문통(柳文通)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예산현 명환 조에 등재되어 있다.
한편, 예산현감 한경(韓警)이 남긴 『오산문첩(烏山文牒)』이 『각사등록(各司謄錄)』에 수록되어 있다. 『오산문첩』은 1758년(영조 34) 11월 2일부터 1763년 5월 27일까지 예산현감에 의해 작성된 각종 공문서가 필사(筆寫)된 자료로, 첩정(牒呈) 399건·이문(移文) 24건·전령(傳令) 50건·사장(辭狀) 1건과 충청도관찰사가 작성한 장계(狀啓) 1건 등이 수록되었으며, 당시 예산현의 행정과 사회 경제상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대흥현의 지방관]
대흥현은 1018년에 운주(運州)에 붙였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관을 두었는데, 조선 건국 후 1407년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413년에 현감을 두어 대흥현이 되었다. 1681년(숙종 7) 7월에는 현종의 태실을 조성하면서 다시 대흥군으로 승격되었다. 1895년 홍주부 대흥군으로 편제되었고, 1896년 충청남도 대흥군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예산군에 병합되었다. 이러한 건치 연혁에 따라 현감이 파견되었다가 다시 군수가 배치되는 변화를 겪었다.
조선 후기의 지리지인 『여지도서』에 따르면 대흥에 파견된 군수의 품계는 문관·음관·무관 4품직이며, 그 휘하에 좌수 1인, 별감 2인, 군관 20인, 아전 53인, 지인 15인, 관노 11인, 관비 9인, 사령 29인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관찬 사료를 통해 대흥에 부임한 지방관은 1415년 홍여간(洪汝簡)부터 1905년 정환덕(鄭煥悳)까지 180여 명이 확인된다. 기록에 없는 경우까지 포함하면 훨씬 많은 수의 지방관이 대흥을 거쳐 갔을 것이다.
[덕산현의 지방관]
덕산현은 고려 때에 덕풍과 이산두 개의 고을이었다. 덕풍은 현종 때에는 운주에 붙였고, 명종 때는 감무관을 두었다. 이산현(伊山縣)은 고려 현종 때에 홍주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관을 두었는데, 조선 건국 후 1405년에 이산현이 피폐하다 하여 두 개의 현을 덕산으로 합병해 1413년 현감을 파견하였다. 1755년 역모를 일으킨 박찬신의 출생지라 하여 덕산현의 반차를 맨 끝으로 바꾸었다가 1847년(헌종 13) 덕산군으로 승격되었으며, 1913년 예산군에 병합되었다.
조선 후기의 지리지인 『여지도서』에 따르면 덕산에 파견된 현감의 품계는 문관·음관·무관 6품직에 속한 관헌이었고, 그 휘하에 좌수 1인, 별감 2인, 군관 8인, 아전 40인, 지인 32인, 사령 27인, 관노 16인, 관비 12인을 두었다.
1896년 편찬된 『덕산현 읍지(德山縣邑誌)』에 선생안(先生案)이 수록되었는데, 여기에는 1436년 전규(田珪)부터 1896년 조종서(趙鍾緖)까지 206명이 확인된다. 그외에 관찬 사료를 검색하면 더 늘어나 220명 이상이 덕산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