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7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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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家煥 |
이칭/별칭 | 정조(廷藻),금대(錦帶),정헌(貞軒),정학사(貞學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순영 |
출생 시기/일시 | 1742년 - 이가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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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71년 - 이가환 진사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77년 - 이가환 증광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80년 - 이가환 비인현감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785년 - 이가환 『대전통편』 편찬에 찬집낭청으로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792년 - 이가환 대사간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795년 - 이가환 공조판서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801년 - 이가환 사망 |
출생지 | 이가환 출생지 -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 |
거주|이주지 | 이가환 거주지 -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 |
묘소|단소 | 이가환 묘소 -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
성격 | 실학자|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여주(驪州) |
대표 관직 | 대사성|공조판서 |
[정의]
조선 후기 예산 출신의 실학자이자 문신.
[개설]
이가환(李家煥)[1742~1801]은 성호 이익의 종손자로 덕산현 장천리 일대[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 세거한 여주이씨 가문의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이다. 1801년 조카 이승훈 등과 함께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사망하였다.
[가계]
이가환의 본관은 여주(驪州)이며 자는 정조(廷藻), 호는 금대(錦帶)·정헌(貞軒)이다.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의 종손자로, 증조할아버지는 이명진(李明鎭), 할아버지는 이침(李沉)이다. 아버지는 이용휴(李用休)이며, 어머니는 참의를 지낸 유헌장(柳憲章)의 딸 진주 유씨(晉州柳氏)이다. 천주교인 이승훈(李承薰)[1756~1801]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활동 사항]
이가환은 1742년 덕산현 고현내면 장천리에서 태어났다. 1777년(정조 1) 증광시에 을과로 급제해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1778년 2월 문신 제술 시험에서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1780년 비인현감을 거쳐 이듬해 7월 예조정랑에 올랐으며 1785년 『대전통편』 편찬에 찬집낭정으로 참여하였다. 1792년 대사간, 1795년 공조판서로 발탁되었다.
이가환은 문장이 뛰어났으며 다방면의 서적을 탐독해 급제 직후부터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데, 정조가 이가환의 “해박함을 당할 수가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가환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이승훈·권철신 등과 함께 순교하였다. 주변 교유 인물들은 대부분 천주교 신자였으나 이가환의 구체적 입교 기록은 없다.
[학문과 저술]
이가환은 어려서부터 작은 할아버지인 성호 이익 문하에서 실학적 가풍을 익히며 자랐다. 정약용(丁若鏞)은 「정헌묘지명(貞軒墓誌銘)」에서 이가환의 학문에 대해 “무엇이든지 한 번 물으면 조금도 막힘없이 쏟아 놓는데 모두 연구가 깊고 사실을 고증하여 마치 전공한 사람 같으니 물은 자가 매우 놀라 귀신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또 문장에도 뛰어나 아버지 이용휴와 아울러 「혜환금대지문(惠寰錦帶之文)」으로 칭송될 만큼 조선 후기 문학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가환의 저서로는 문집 『금대관집(錦帶館集)』 10책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다른 저술로 『시문초(詩文艸)』 4권 4책, 『시문(詩文)』 2권 1책, 『금대시문초(錦帶詩文抄)』 1책, 『금대전책(錦帶殿策)』 등이 전한다.
[묘소]
이가환의 묘소는 원래 예산군 고덕면에 있었으나, 1987년 후손들이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로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