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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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鍾浩 |
이칭/별칭 | 정진호(鄭鎭浩)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문경호 |
출생 시기/일시 | 1911년 06월 17일 - 정종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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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28년 - 정종호 예산공립농업학교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5월 - 정종호 좌익협의회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9월 18일 - 정종호 예산학생동맹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12월 27일 - 정종호 만경좌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 |
몰년 시기/일시 | 1979년 6월25일 - 정종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정종호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출생지 | 정종호 출생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92 |
거주|이주지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면 예산리 |
학교|수학지 | 예산공립농업학교 - 충청남도 예산군 |
활동지 | 예산공립농업학교 - 충청남도 예산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정종호(鄭鍾浩)[1911~1979]는 예산공립농업학교에서 독서회, 좌익협의회, 예산학생동맹, 토요회 등을 조직하여 학생 항일 운동을 주도하였다. 정진호(鄭鎭浩)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활동 사항]
정종호는 1911년 6월 17일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92번지에서 태어났다. 1928년 예산공립농업학교(禮山公立農業學校)에 입학하였다. 같은 해 4월에 윤봉길(尹奉吉) 등 뜻을 같이하는 36인과 함께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고 이사를 맡아 농촌 개혁 운동, 부흥 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일본인의 한국인 학생 차별에 맞서 학우인 강봉주 등과 독서회를 조직하여 항일 투쟁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고 토론을 벌이는 등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당시 유행하던 문맹 퇴치 운동과 문자 보급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32년 함께 활동하던 윤봉길이 상하이에서 의거를 일으키자 그에 자극을 받은 정종호는 같은 해 5월 초순 박정순, 오일교, 강봉주 등과 함께 좌익협의회를 조직하였다. 당시 좌익협의회에서는 연구부, 조직선전부, 에스페란토어부 등 3개의 조직이 있었는데, 정종호는 주로 조직선전부에서 활동하며 공산주의 사상을 연구하고 선전하였다. 1932년 6월 학교 측이 학생들에게 동원령을 내려 강제로 학생들을 동원하려 하자 박희남, 강봉주 등과 함께 “학생 강제 노력 동원 반대”,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치는 반민족적인 행위 시정”, “한일 학생의 차별 폐지”, “한국인 교사 증원” 등을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이를 계기로 같은 해 7월 좌익협의회 회원 다수가 제적, 퇴학, 무기정학 등의 처분을 받게 되어 좌익협의회는 해소되었다.
동맹휴학 사건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정종호는 또다시 좌익협의회 학생들을 규합하여 예산학생동맹(禮山學生同盟)을 조직하였으며, 대외적으로 각 지역의 청년 조직 및 서울 YMCA 등의 학생 조직과 연계를 시도하였다. 이를 눈치 챈 일본 경찰들이 학생회에 대한 비밀 수사를 전개하자 조직 관리를 맡았던 정종호는 학생동맹을 위장하기 위해 토요회로 명칭을 바꾸는 한편, 주변 조직과의 연계를 강화하여 반일 투쟁의 방법을 모색하였다.
정종호는 1932년 일제의 관제 연극 단체인 만경좌(萬鏡座)가 「동방의 빛」이라는 반민족적인 연극을 예산장터에서 공연하는 것에 반대하여 이를 저지하기 위한 관람 거부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공연 중단을 요구하다가 극단원들과 충돌한 사건을 계기로 1932년 12월 27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정종호는 1933년 3월 3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9년 6월 25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정종호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