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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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仁元 |
영어공식명칭 | Cho In-won |
이칭/별칭 | 백효(伯孝),야운(冶雲)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이성우 |
[정의]
일제강점기 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조인원(趙仁元)[1875~1950]은 1919년 3월 3일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 한내장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대한독립단 충청도지단 등에서 활동하였다.
[가계]
조인원의 본관은 한양(漢陽)이며 자는 백효(伯孝), 호는 야운(冶雲)이다. 아버지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 당시 덕산지소장을 지낸 조종호(趙鍾灝)이고,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이다.
[활동 사항]
조인원은 1875년(고종 12) 덕산현 내야면 시묘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3월 3일 고덕면 대천리 한내장 만세운동의 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파견원인 이영식(李英植)과 더불어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충청도지단을 조직했다. 조인원은 서무부장을 맡아 지단장 서병익(徐丙益), 부단장 김석주(金錫周) 등과 함께 독립운동 관련 문건을 배포하는데 주력했다. 1920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열국이 승인해도 정치적 명령이 국내에서 떨치지 못하는 것은 일제 때문이니, 조선인은 세금을 납부하지 마라. 만약 이에 따르지 않으면 독립군이 국내로 들어올 때 후회할 것이다.”라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명의의 선전물을 예산군 삽교면 역촌리 등에 부착한 일로 체포된 조인원은 1921년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조인원은 출감 후 일제의 감시가 삼엄해지자 계몽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어 문맹 퇴치에 힘썼다. 1945년 광복이 되어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봉환할 때 동참하였으며, 말년에는 고향에서 살다가 1950년 12월 21일 사망하였다.
[묘소]
조인원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23-1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조인원의 공적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예산군 봉산면 시동리에 조인원의 공적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