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8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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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惺牛 |
이칭/별칭 | 경허(鏡虛)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지원구 |
[정의]
개항기에 수덕사를 비롯한 충청남도 일대에서 활동한 선불교의 중흥 시조.
[개설]
성우(惺牛)는 한국 선불교의 중흥 시조이며 예산 수덕사에서 선풍을 크게 일으킨 인물이다. 1849년 전주 자동리에서 아버지 송두옥(宋斗玉)과 어머니 밀양박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속명은 송동욱(宋東旭)이다. 법명은 성우, 법호는 경허(鏡虛)이다.
[활동 사항]
성우는 9세에 과천의 청계사(淸溪寺)로 출가하였고, 계허(桂虛)의 밑에서 5년을 보내고, 1862년(철종 13)부터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萬化)에게 불교경론을 배웠으며, 9년 동안 제자백가를 익혔다.
1871년(고종 8) 동학사의 강사로 추대되었고, 천장암(天藏庵)으로 옮겨 1880년 용암(龍巖)의 법통을 이었으며, 스스로 청허(淸虛)의 11대손, 환성(喚惺)의 7대손이라 밝혔다. 1884년 천장암에서 만공(滿空), 혜월(慧月), 수월(水月) 등의 삼대 제자를 지도하였다. 1886년 6년간의 깨달음 뒤의 공부를 끝내고 충청남도 일대의 개심사(開心寺)와 부석사(浮石寺)를 왕래하면서 후학 지도와 교화 활동을 하면서 크게 선풍(禪風)을 떨쳤다.
1894년 동래 범어사(梵魚寺)의 조실이 되었고, 1899년 합천 해인사에서 임금의 뜻에 따른 인경불사(印經佛事)와, 신설하는 수선사(修禪社) 등의 불사에 법주(法主)가 되어 「해인사 수선사 방함인(海印寺修禪社蒡啣印)」과 「합천군 가야산 해인사 수선사 창건기」를 집필하였다. 금릉군 청암사(靑巖寺)에서 한암(漢巖)을 깨닫게 하였으며, 1900년에는 지리산 천은사(天隱寺)에서 여름을 지낸 뒤 화엄사(華嚴寺)로 옮겨갔다. 1902년에는 범어사 금강암(金剛庵)과 마하사(摩訶寺) 나한상(羅漢像)의 개분불사(改粉佛事)에 증사(證師)가 되었다. 1904년에는 오대산·금강산 등을 두루 돌아, 안변 석왕사(釋王寺)에서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의 개금불사(改金佛事)에 증사로 참여하였다. 1904년 천장암에서 만공에게 최후의 법문을 한 뒤 갑산(甲山), 강계(江界) 등지에서 박난주(朴蘭州)라고 개명하고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1912년 4월 새벽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성우는 수덕사에서 선풍을 일으켰으며, 그 문하에는 근대 한국불교 선문(禪門)을 연 만공·혜월·수월 등이 있다. 선지종찰로서 수덕사의 맥은 성우 때부터 시작되었다.
수덕사 근역성보관에는 성우의 친필 「무이당」 횡액과 「심우도」 병풍이 남아 있다.
[사상과 저술]
성우의 사상은 무생(無生)의 경지를 이상으로 삼으며, 인간의 참모습을 ‘생김 없고, 없어짐 없는’ 근원적 예지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아울러 무상(無常)을 초극하는 길은 오직 선(禪)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선과 교(敎)는 하나라고 주장하고, 교선겸수(敎禪兼修)를 강조하였다. 마지막으로는 간화선(看話禪)과 염불선(念佛禪)은 완성된 경지에서 볼 때, 방법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저서로는 『경허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