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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323
한자 朝鮮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정의]

1392년 조선 개국에서 1910년까지 조선 왕조 시기의 충청남도 예산 지역의 역사.

[개설]

예산군은 조선시대 홍주목 관할 예산현, 대흥현, 덕산현 3개 군현이 하나로 합쳐진 행정권역이다. 문화적으로는 충청남도의 내포 문화권에 속한다. 각 군현은 인구 규모로 볼 때 덕산, 대흥, 예산의 순이었다.

조선 초에는 국가 제사의 대상이었던 대흥현(大興縣)의 대잠도(大岑島)[지금의 봉수산 아래]와 덕산현의 가야갑(伽倻岬)[가야산]이 있었고, 덕산과 대흥에는 왕실의 태실(胎室)이 많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1868년(고종 5) 독일 상인인 오페르트(E. J. Oppert)가 조선과의 통상 요구를 강제하기 위해 가야산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한 사건이 벌어졌고, 이에 조선의 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은 강화되었다.

1895년 홍주부 예산군, 대흥군, 덕산군으로 개편되었다가, 1896년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군, 덕산군이 되었고, 1914년 3개 군을 통합하여 예산군이 되었다.

[행정 연혁과 지리적 공간 범위]

예산과 대흥(大興)은 모두 고려 말 감무를 두었던 곳이었는데 1413년 현감이 파견되었다. 덕산(德山)은 1405년(태종 5) 고려 말 이산현(伊山縣)과 덕풍현(德豐縣) 2개 고을이었던 것을 하나로 합쳐 덕산으로 개칭하고 현감이 파견되었다. 대흥현은 1681년(숙종 7) 현종(顯宗)의 태실이 봉안되고 석물을 중수하면서 대흥군(大興郡)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의 예산현 지역은 현재 예산군 대술면·예산읍·오가면 일대 및 신암면계촌리, 두곡리, 별리, 예림리, 오산리, 용궁리, 조곡리, 종경리, 중례리, 탄중리이다.

대흥현광시면·대흥면·신양면·응봉면 지역이고, 덕산현고덕면·덕산면·봉산면·삽교읍신암면 하평리와 당진시 합덕읍의 도리·신흥리·잠원리·합덕리 지역이다.

현재의 예산군은 1914년에 예산군·대흥군·덕산군과 공주의 일부를 합하여 성립된 것이다.

[사회와 경제]

조선시대 예산 지역인 덕산·대흥·예산 3개 군현의 인구 규모 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덕산은 예산에 비해 2배에 이를 만큼 호구의 규모가 컸다. 모두 삽교천에 가까워 조선 후기에 농업생산기술의 발전과 함께 경작지가 확대되며 사회경제적으로 빠르게 성장하였던 지역이다.

15세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덕산은 호수(戶數) 649호, 구수(口數) 3,214구로 호당구수가 5.0이었고, 대흥은 호수 388호, 구수 1,518구, 호당구수 3.9였으며, 예산은 호수 321호, 구수 1,477구, 호당구수 4.6이었다. 1789년의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따르면, 덕산의 호수는 5,361호, 구수는 1만 8970구, 호당구수는 3.5였고, 대흥의 호수는 3,388호, 구수는 1만 3638구, 호당구수는 4.0이었으며, 예산의 호수는 2,834호, 구수는 9,226구, 호당구수는 3.3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토지의 비옥도가 표기되어 있다. 세 군현을 비교하면 덕산과 예산은 ‘비척상반(肥塉相半)’, 즉 비옥하고 척박한 것이 반반이었고, 대흥은 비옥한 곳보다 척박한 곳이 더 많은 지역이었다. 지역의 토산품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 세 군현에서 주로 생산되던 물산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대개 곡식과 짐승가죽, 민물고기류가 많았고, 수공업으로 제작한 것으로는 종이, 도자기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예산에는 토의로 오곡(五穀), 조[粟], 팥[小豆], 참깨[胡麻], 토공으로 종이[紙], 자리[席], 칠(漆), 잡깃[雜羽], 족제비털[黃毛], 여우가죽[狐皮], 너구리가죽[狸皮], 말린 잉어[乾鯉漁], 조피나무열매[川椒], 감[柿], 대추[棗], 약재로 산골[自然銅], 인삼(人蔘) 등이 있고, 대흥에는 토의로 기장[黍], 피[稷], 콩[(菽], 팥, 보리[麥], 배[梨], 닥나무[楮], 토공으로 대추, 종이, 잡깃, 자리, 여우가죽, 너구리가죽[狸皮], 족제비털, 약재로 북나무진[安息香], 산골, 조피나무껍질[川椒], 인삼, 속서근풀[黃芩], 기타 사기그릇, 오지그릇 등이 있으며, 덕산에는 토의로 오곡, 조, 참깨, 팥, 토공으로 영지[芝草], 대추, 감, 여우가죽, 너구리가죽, 노루가죽, 사슴가죽[鹿皮], 밀[黃蠟], 칠, 자리 등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예산에는 토산으로 사기그릇[磁器], 숭어[秀魚], 게[蟹], 웅어[葦魚], 복령(茯笭), 대흥에는 토산으로 붕어[鯽魚], 게, 지황(地黃), 덕산에는 토산으로 지치[紫草], 옷칠[漆], 붕어, 숭어, 뱅어[白魚], 산무애뱀[白花蛇] 등 있었다.

물산이 거래되는 장시에 대해서는 18세기 서유구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장시는 대체로 5일장 체제로 운영되었고, 각 지방의 생산품이 거래되었다. 이에 따르면 대흥에는 2개소, 예산 2개소, 덕산 3개소가 있었다. 이 가운데 대흥 광시장이 5·10일장, 예산 입석리장이 2·7일장, 덕산 대천장이 3·8일장으로 규모가 컸다. 광시장과 입석리장은 소나 송아지를 거래하는 우전이 섰을 만큼 인구의 이동이 많은 큰 장터였다. 그리하여 보부상이 활발하게 활동하며 개항 이후 예산을 중심으로 근대적인 시장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예산 지역의 현감과 군수]

덕산, 대흥, 예산 지역에 부임했던 수령들의 재임 시기 활동을 살펴보면, 각 지역의 사회상이 나타난다. 세 군현의 선생안은 일부나마 남아 있다. 선생안과 관찬사서를 통해 검색된 자료를 보면 1863년까지 덕산 189명, 대흥 153명, 예산 126명가량이 확인되어 1인 평균 2~3년간 재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행적이 기록된 경우는 주로 임지로 떠나기 전 왕에게 하직하며 당부를 들을 때와 불미스러운 평가를 받았을 때가 많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국가 전란기에 예산 지역의 상황을 보여 주는 자료는 많지 않은데, 이 시기 부임했던 군현 수령들의 파직 내역을 보면 대개 관리의 사리사욕과 형벌의 남용, 과한 세금 징수와 같은 사안이었다. 즉, 전란 자체의 고통만큼이나 관리의 부정부패가 백성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밖에 조운선과 창고의 관리감독, 아전의 농간 감시, 군사물자의 관리, 백성의 구휼을 엄격히 하였고, 개인의 행실문제나 불효, 음주 등의 죄도 엄중하게 다루었다.

특히 1600년대 이후 관리의 포폄에 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사례가 많다. 이 시기 덕산현감이 사사로이 소를 잡았던 문제가 발각되기도 하였고, 덕산향교의 재임 이름을 삭제하였다는 오해를 받아 중상을 받은 일도 있었다. 당진의 용궁동 제언을 쌓을 때에 덕산 사람들이 징발되기도 하였고, 현감이 고을의 조세 탕감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려 조정에서 논의된 일이 있었다. 1740년과 1750년 덕산에서는 허호(虛戶)가 크게 늘어 문제가 되었는데 1750년에는 무려 500호가 줄었다.

대흥현감은 1600년에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여 포상받기도 하였고, 1681년에 태실이 대흥에 설치됨으로써 현감이 군수로 승격된 일도 있었다. 1614년에는 아산창의 차사원 역할을 서리에 맡겼다가 징계를 받고 1733년에는 창고 곡식을 사적으로 팔아 재물을 형성한 대흥현감도 있다. 한편 1659년 도 관찰사가 대흥에 묘를 쓰겠다며 백성 수십 호를 쫓아내자 이것은 차마 눈감아 줄 수 없다고 반대하여 끝내 관찰사의 의지를 꺾게 하였던 대흥현감 임준(任濬)의 사례는 목민관의 모습을 보여 준다. 고을의 자제를 교육시키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구휼에 힘쓴 이들도 적지 않다.

[교통과 통신]

조선시대의 교통과 통신은 도로와 역원 제도 및 봉수시설이다. 역원제는 고려시대부터 정비되기 시작해 조선에 들어서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면서 역로의 신설과 재편, 역의 합병을 통한 역로망을 발전시켰다. 『경국대전』 편찬 당시 전국은 41역도 524역으로 편제되었는데, 이것은 조선 후기까지 큰 변동 없이 유지되었다. 각 역도에는 산하 역참의 관리를 위하여 중앙에서 찰방(察訪)[종6품]이나 역승(驛丞)[종9품]을 파견하였다. 충청남도 지역에는 4개의 찰방역(察訪驛), 즉 성환역(成歡驛), 이인역(利仁驛), 시흥역(時興驛), 금정역(金井驛)이 있었는데 1614년(광해군 6)에 시흥도가 폐지되고 모두 금정도에 속하게 되었다.

역과 역 사이에 숙박시설로 각 역에서 관리하는 원(院)을 설치하였다. 이 중 예산 지역과 관련있는 역도는 금정도시흥도였다. 모두 서울에서 충청수영까지의 대로(大路)인 ‘충청수영로’의 본선과 지선상에 위치하였다. 충청수영로의 노선을 보면 예산 신례원이 입구가 되고, 여기에서 홍성, 예산, 서천, 대흥으로 갈라진다. 덕산은 서천을 거쳐 이르게 된다.

예산 지역 3개 군현 중 대흥의 광시역(光時驛)[예산군 광시면]이 금정도 소속이었고, 그 외에 예산의 일흥역(日興驛)[예산군 오가면 역탑리 역말]과 신례원(新禮院)[예산군 예산읍 신례원리], 덕산급천역(汲泉驛)[예산군 삽교읍 역리]과 봉조원(奉詔院)[삽교읍 신리 봉쟁이 비석거리]은 모두 시흥도 소속이었으나, 조선 후기 역제 개편으로 모두 금정도 관할이 되었다.

[예산 지역의 사족 활동]

유교문화를 상징하는 양반 사족의 활동상은 사림파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중종 대부터 살펴볼 수 있다. 중종 대 기묘사화와 관련된 사림파 인물을 분석한 자료를 보면 당대 95인의 사림파 중 충청도를 근거지로 하는 이들이 15인이었고, 이 중 예산에만 임추(任樞), 임유겸(任由謙), 임권(任權), 이사검(李思儉), 김구(金絿) 등 5인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모두 토착 성씨가 아니라는 점이 주목된다.

조선 중기 이후 율곡 이이의 정통을 이은 김장생, 김집, 송시열 등이 활동하고 그 학맥을 이은 학자들이 주로 충청권에 포진함으로써 충청의 유교문화는 금강 유역의 공주와 논산 지역에서 발전을 보였고 정치적으로는 서인 노론계의 터전이 되었다.

예산 지역은 1700년대 초 덕산, 예산, 대흥에 각각 하나씩의 서원이 창건되면서 사족 활동이 꽃을 피웠는데 예산의 덕잠서원(德岑書院) 은 1714년에 사액을 받기도 하였다. 1708년 송시열을 제향하는 집성사가 예산에 건립된 이래 1705년부터 1709년까지 4년간 주요 서원이 자리 잡았는데, 특히 이 모든 서원은 제향 인물의 후손이 적극적으로 주도한 것이 아니라 서인 노론계의 지원과 협조 아래 건립이 추진되었다. 각각의 서원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따라 모두 철폐되었다. 『열읍원우사적』, 『서원가고』,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예산군의 서원은 예산의 적잠서원은 1705년, 덕산회암서원(晦庵書院)은1709년, 대흥의 소도독사(蘇都督祠)는 고려시대, 대흥의 우천사(牛泉祠)[牛井祠]는 1708년에 건립되었다. 현재 우천사의 건물은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한편, 지방의 공교육을 담당했던 향교가 세 군현에 각각 하나씩 설치되었는데 모두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개 조선 태종 초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흥향교는 1591년 한 차례 이건하였고, 예산향교는 이건하였다는 전설이 있지만 확실치 않고, 덕산향교는 원위치 그대로 이어 오고 있다. 예산향교는 1684년 화재로 위판이 소실된 적이 있고, 덕산향교의 경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중에 소실되었다가 인조 대에 중건하였다. 예산향교에는 향교 운영과 관련된 문서류가 많이 전하고 있어 19세기 말 향교 운영 실태를 점검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예산 지역에서는 조선시대 대표 서예가로 손꼽히는 추사 김정희와 관련된 다양한 유물, 유적을 포함하여, 조선 전기 3대 명필인 자암 김구아계 이산해 등 서예와 문장으로 유명했던 인물을 배출하여, 충청의 유교문화에 대한 관심이 부상하는 가운데 예산의 서예 문화가 주목받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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