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몽학의 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345
한자 李夢鶴-亂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정의]

1596년(선조 29) 임진왜란 중 이몽학이 충청도 홍산에서 반란을 일으켜 지금의 예산군 지역인 대흥관아 등을 습격하고 덕산까지 도망갔던 사건.

[개설]

임진왜란으로 온 국토가 피폐에 빠진 1596년(선조 29) 7월 6일, 충청도 홍산 무량사에서 이몽학이란 인물이 왕권을 타도하고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목표로 민란을 일으켰다. 이몽학은 신분과 출신지가 정확하지 않고 다만 왕실의 서얼 출신으로만 알려져 있다. 당시 전란 속에서 정부의 무능함에 분노하였던 백성들 상당수가 반란군에 가담하였고, 삽시간에 충청도 일대를 장악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이몽학의 무리가 지났던 곳 중에는 예산 지역인 대흥과 덕산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반란이 7일만에 진압됨으로써 가담자들은 극형을 받았고, 난을 무력으로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이들은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책록되었다.

[역사적 배경]

1596년 일본이 부산 동래를 통해 상륙하여 조선을 침공하며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지 17일 만에 선조는 융복(戎服)에 주립(朱笠)을 눌러 쓴 차림으로 피난길에 올랐고, 왕실의 파천 행렬을 목격한 백성들은 파천 행렬에 돌을 던지고 궁궐에 불을 지르는 등 왕실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민심이 동요하는 가운데 전국적으로 가을 추수기를 놓치고, 이듬해에도 농사를 완전히 망치고 말았다. 그러나 과중한 부역과 징발은 더해졌으며 명나라의 군대와 관군, 의병의 군량미가 백성들의 부담이 되는 바람에 민생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굶어 죽는 자가 속출했고, 전염병이 돌았다. 전쟁은 계속되었다. 극심한 혼란과 불안 속에서 전국 곳곳에서 반란군이 일어났다. 그중 가장 대규모의 사건이 1596년 충청도 홍산에서 벌어진 ‘이몽학의 난’이다.

[경과]

이몽학의 출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이 ‘서인(庶人)’이란 기록만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몽학은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선봉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모속관이란 군량미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아 파견된 관리였으므로 이몽학과 한현은 백성들의 참담한 삶과 민심의 이반을 직접 접할 수 있었고, 계급적 한계와 불안한 사회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되었다. 여기에 뜻을 함께하는 권인룡, 김시약 등의 인물이 동조하였고, 마침내 1596년 7월 초, 충청도 홍산현(鴻山縣)[지금의 부여군 북서부 지역] 무량사에서 역모를 모의하며 동갑회(同甲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도천사의 승려들과 인근 가난한 농민들을 규합하여 선봉에 섰다.

이몽학의 반란은 삽시간에 호서 지역 일원을 장악하고 민심을 동요시켜 한양까지 위협하였다. 600~700여 명의 군사들로 시작되어 임천, 청양, 대흥 등 여러 고을을 거치면서 그 무리가 수천, 수만 명으로 늘어났다.

반란군은 처음 홍산현을 습격하여 현감 윤영현(尹英賢)을 붙잡았고, 임천군(林川郡)을 습격하여 군수 박진국(朴振國)의 항복을 받았다. 그리고 정산현(定山縣)과 청양현(靑陽縣)을 함락하였을 때 두 고을의 현감은 이미 도망간 후였다. 1596년 7월 9일에는 대흥군(大興郡)으로 들어갔고, 대흥군수 이질수(李質粹)는 도망가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부여현감 허수겸(許守謙)은 반란군이 부여로 들어오자 싸워볼 생각도 못한 채 항복하였다. 서산군수 이충길(李忠吉)은 몰래 반란군을 도와주기까지 하였다. 이몽학은 내포의 수부도시였던 홍주를 침범하였는데, 이때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은 군사를 모으고 철저히 대비를 준비하며 관속을 보내 거짓 투항하게 하여 방심한 틈을 타 홍주에 살고 있던 박명현(朴名賢)·임득의(林得義) 등을 불러 군사를 대기하게 하였다.

체찰사종사관 신경행(辛景行)은 인근 고을로 전령을 보내 구원을 청하고 수사 최호(崔湖)도 홍주성으로 들어와 반란군에 대한 대비 체제를 갖추었다. 홍주성 밖에 있는 민간의 초가집들은 반란군이 비를 피하고 밥을 해먹는 등 주둔할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불화살을 쏘아 모두 태웠다.

한편, 반란군 측에서는 한현이 아버지의 상으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대부분의 군사는 관군과 달리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홍주성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결국 상황은 반란군에 불리하였고, 어둠을 틈타 도망치는 자들이 속출하였다. 이몽학은 남은 군대를 이끌고 덕산(德山) 길로 향하였다. 그러나 이미 온양과 유구의 길목은 모두 관군에 의해 막혀있어 더 이상 진격이 불가능하였다.

쫓기던 이몽학은 청양에까지 이르렀는데, 이몽학을 따라온 관군측 전주판관 윤계(尹誡)는 이몽학의 진영을 향해 적장의 머리를 베어 오면 몰살의 화를 면하게 해 준다며 강공과 회유를 시도하였다. 반란군 내부는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김경창(金慶昌)과 임억명(林億命) 등이 이몽학의 목을 베고 나와 투항함으로써 반란은 종식되었다.

[결과]

선조는 동지의금부사 윤승훈(尹承勳)을 직산(稷山)으로 보내 죄인들을 심문하게 하고, 그 경중을 가려 단순 가담자들은 석방하고, 중죄인 100여 명을 서울로 송치하였다. 주동자 33명은 사형에 처하며 연좌시키고 가산을 적몰하였다. 홍산현은 반란군의 근거지라 하여 폐현(廢縣)이 되었다.

한편, 난의 토평(討平)에 공을 세운 이들은 1604년 청난공신으로 책록되었다. 홍주목사 만전당 홍가신은 일등 공신이 되었고, 2등에 박명현·최호, 3등에 신경행·임득의 등이 책록되었다. 이몽학의 목을 벤 김경창과 임억명 등은 종2품에 해당하는 당상관급인 가선대부의 작위를 받았다. 그런데 반란군의 심문 과정에서 의병장들이 무고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김덕령(金德齡)·최담령(崔聃齡)·홍계남(洪季男)·곽재우(郭再祐)·고언백(高彦伯) 등이 무인(誣引)[거짓으로 죄를 꾸며 죄 없는 사람을 끌어들임]되었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중 벌어진 이몽학의 난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평가가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훗날의 역사에는 이몽학을 개인적인 야욕을 가진 무모한 인물로 기록하고 있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당대의 사회적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앞장섰던 인물로 재평가되며 각종 역사콘텐츠의 주인공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예산 지역은 이몽학의 난과 관련해서 간략한 사실 외에 구체적인 역사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반란군이 대흥관아를 습격하고, 관군에 쫓긴 이몽학의 무리가 덕산으로 도망갔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이다. 이몽학의 반란군이 승승장구하던 모습을 기록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의하면 “밭을 매는 자는 호미를 들고, 행상하던 사람은 막대기를 가지고 다투어 따랐으며, 모두들 좋다고 떠들면서 그를 따랐다.”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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