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6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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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養英學院 |
영어의미역 | Yangyeong Institute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형목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지역에 있었던 사립 교육 기관.
[개설]
문화운동이 확산되면서 대한제국 이후 교육열은 고조되었으나 학교가 부족하여 만성적인 입학난이 계속되면서 급한 현안으로 부각되었다. 공립보통학교는 입학시험을 통하여 신입생을 선발하는 등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하였는데, 입학 지원자 가운데 30~40% 정도만 수용할 뿐이었다. 학령아동(學齡兒童) 구제를 위한 강습회 운영도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하여 각 지역 유지들은 강습소·사립학교·야학 설립을 통하여 ‘조선인 본위교육’을 제창하고 나섰다.
[설립목적]
양영학원은 교육열 고조에 따른 입학난을 해소하여 학령아동의 교육과 식민지 노예교육에 반대하는 민족교육을 실현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변천]
1922년 송병직(宋秉直)이 설립하였다. 송병직은 교원위원 망년회 석상에서 교원 모두가 설립자임을 강조하였는데 명용준(明容駿)·정일범(鄭一範)·이토 신노스케[伊東新之助]·김창규(金昌圭)·이병민(李秉玟) 등이 무보수로 교원직을 수행하였다. 1923년 1월 당시 재학생은 200여 명이었다. 교세 확장과 교육 내실화에 따라 학교 당국이 중등교육 기관으로 승격시킬 계획을 마련하였다.
1924년 신입생 모집 요강에 따르면 신입생은 초등과 300명, 중등과 1부 100명, 중등과 2부 50명 등 총 450명에 달하였다. 1925년 말 당시 재학생 수는 98명이었다. 학교는 강경면 황금정 157번지에 있었고, 30여 칸에 달하는 건물이었다. 수용 능력은 300명 정도였다.
한편 양영학원이 1925년부터 경영난에 직면하자 『동아일보』는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등 사회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지역 유지들도 후원회를 조직하는 등 학교 유지와 발전을 위한 중장기적인 방안을 강구하였다.
[활동사항]
1922년 9월 개학과 동시에 학생들은 양영학우친목회를 조직하는 등 친목 도모와 향학열을 불태웠다. 또한 정기적인 토론회나 강연회 등을 통하여 시국 현안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였다. 주제는 「신시대를 맞는 우리는 자아를 개조할 것인가, 보수할 것인가」, 「이야기」, 「신시대의 요구」, 「생존의 요의(要義)는 자력의 분투에 재함」, 「가난의 눈물」, 「환경에 도전하자」, 「가정혁신은 용단이냐 인내이냐」 등 시의적절한 문제였다.
설립 1주년에 즈음하여 개최한 대강연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간단한 기념식만 거행하고 말았다. 보통과와 고등과 95명으로 구성된 수학여행단은 서울의 많은 사적지 관람을 통하여 문화 민족으로서 긍지를 가졌다. 부여로 간 원족회도 마찬가지였다. 1923년 11월 양영학우친목회는 회칙을 일부 변경하여 첫번째 수요일은 토론회, 두번째 수요일은 운동회, 세번째 수요일은 노동회, 네번째 수요일은 회고회 등을 개최하였다. 운동회는 친목 도모와 협동심을 배양하는 동시에 정서 순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의의와 평가]
양영학원은 1920년대 강경지역을 대표하는 교육기관으로 학령아동교육은 물론 지역 활동가를 배출하는 민족교육의 산실 기능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