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A03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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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시묘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홍제연 |
❚ 수익이 높은 작물을 찾다
최재현 씨가 사업에 실패하고서 돌아온 고향에서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농사였지만, 그때까지 직접 땅을 파 본 적이 없을 만큼 큰 고생을 모르고 살았던지라 바로 논밭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마침 들려오는 소문은 채운면 용화리에서 시작된 딸기농사가 수익이 좋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당장 채운면의 딸기밭을 찾아가 농사법을 살펴본 후 딸기 묘를 받아와 시묘골에 재배를 시작했다. 당시 채운면의 딸기농법은 밭에서 기르는 방식으로 소규모로 하더라도 다른 어느 작물에 비해 월등한 소득을 얻고 있었다.
채운면을 견학한 후 돌아와 1~2년간은 같은 방법으로 딸기를 길러본 후 학교에서 배웠던 수막재배 방식을 실제로 도입해 보기로 마음먹고 밭이 아닌 논에 딸기묘를 심었다. 1973년경이었다. 이 방법은 물을 활용해 온도를 조절하는 것이었으므로 논농사와 잘 어울렸고 딸기 수확량이 훨씬 좋았다. 이때에 대나무로 만든 작은 비닐하우스를 활용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딸기농사가 알려지자 논산군에서 공무원들이 찾아와 딸기밭의 사진을 찍어 영사기에 담았다. 그들과 함께 최재현 씨는 딸기농법을 알리기 위해 강의를 하기도 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논산의 전 지역에서 서서히 딸기농사에 동참하였고 ‘논산딸기’는 이렇게 붐이 일었다.
❚ 새로운 콘텐츠로 떠오른 딸기
딸기는 그야말로 ‘효자’라 할 수 있었지만 너무 많은 인력이 필요한 탓에 고소득을 포기하고 농사를 접는 경우도 있었다. 부수골의 최정태 씨는 딸기농사로 번 돈으로 새 집을 짓기도 했지만 일을 도와주던 아들이 먼 학교로 진학하자 결국 딸기농사를 그만두었다. 미련이 있었지만 온 동네에서 딸기농사를 하고 있으니 자신의 농사를 도와줄 사람을 구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딸기농가에서는 최정태 씨처럼 새집을 짓고, 1970년대에 텔레비전을 사들이기도 하는 등 시묘리는 어느 곳도 부럽지 않은 부촌(富村)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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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황골
당시 최재현 씨는 논산 딸기의 국내 생산 점유율이 점점 높아지는 것을 보며 ‘논산 딸기’가 지역을 대표할 수 있을 만하다는 생각에 마침 논산 군수를 만난 자리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 무렵 논산에서는 관촉사 입구의 벚꽃 길을 중심으로 벚꽃 축제를 벌일 때였는데 사실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최재현 씨 입장에서는 영 마뜩치 않은 행사였다. ‘왜놈’이 심은 벚꽃이 아닌가.
그러나 일이 잘 되려고 그랬는지 전일순 논산군수는 최재현 씨의 논산농고 후배여서 이야기가 잘 통했다. 벚꽃축제 말고 딸기축제를 해보자는 그의 건의가 먹혀들었고 딸기농가의 호응이 어울려 2001년에 드디어 딸기축제가 개최되었다. 이때의 일이 계기가 되어 최재현 씨는 지금도 딸기 축제 행사의 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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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축제 행사장 전경
[정보 제공자]
최재현, (1928년생, 시묘1리 주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