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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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濟州-獻馬功臣金萬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조성윤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550년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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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594년 - 조정에 말 500필을 바침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18년 - 조정에 말 500필을 바침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20년 -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 관직을 제수 받음.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32년 - 사망 |
김만일묘역 - 의귀리 1773번지 속칭 서위남루 |
[개설]
김만일(金萬鎰)은 경주 김씨 입도조(入島祖)인 김검룡(金儉龍)의 7세손으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출신이다. 김만일은 조선 선조 시기 전국 최대의 목장 지대였던 제주도에서 임진왜란 발발 당시 가장 많은 말을 소유하고 기르던 부자였다. 그는 목장 경영에 성공하여 많은 말을 소유하였고, 임진왜란 이후 계속되는 전란으로 중앙정부가 말 부족에 시달릴 때 자신의 말 중에 상당 부분을 국가에 바쳤고, 자신은 물론 아들 손자까지 벼슬을 제수받았다.
김만일 사후에도 경주 김씨 가문에서 계속해서 말을 바치자, 조정에서는 산마감목관(山馬監牧官) 직책을 신설하여 경주 김씨 가문의 세습직으로 인정하였다. 말하자면, 한라산 일대의 넓은 땅을 목장으로 제공하고, 대신에 우수한 말을 정기적으로 상납하도록 한 것이다. 말이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던 시대에 이와 같은 목마 관리 체제가 200년 이상 계속되었다는 것은 경주 김씨 가의 목장 경영 능력이 탁월했었음을 말해 준다.
[김만일의 헌마와 포상]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선조 27) 조정에서는 전마(戰馬)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전쟁의 피해로 전국 대부분의 목장이 제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따라서 전마를 보충할 방법은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제주에서 말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해진 수량의 진상마(進上馬)와 국영 목장에서 차출하는 말만으로는 크게 부족했다. 따라서 개인이 소유하고 기르던 사둔마(私屯馬)를 징발하려 하였다. 정부가 김만일에게 전마를 요청하자, 김만일은 기꺼이 500필을 바쳤고, 그 뒤에도 광해군대와 인조대에도 정부의 요청에 따라 계속해서 말을 제공하였다.
그 공로로 김만일은 높은 관직과 포상을 받았는데, 1618년(광해군 10) 종2품 가선대부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제수받았고, 그 뒤 다시 정2품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세 번째로 말을 바쳤던 1629년(인조 6)에는 다시 직급을 높여 종1품 숭정대부를 제수받았다. 이 같은 대우는 매우 파격적인 조치였다. 때문에 정부 대신 사이에서는 대우가 지나치다는 주장이 강했다. 그러나 말의 헌납을 중요시여긴 왕에 의해 그대로 시행되었다. 따라서 김만일은 역대 제주인으로는 가장 높은 벼슬을 받게 되었다.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衣貴里)는 마을 이름이 매우 특이하다. 이런 이름이 붙게 된 까닭은 그 마을에 살던 김만일이 높은 관직과 함께 관복을 왕으로부터 받아 돌아왔기 때문이다.
[산마 감목관직의 신설과 세습]
김만일의 큰아들 대명(大鳴)에게는 수령을 제수하여 보성 군수를 역임하였고, 둘째 아들 대성(大聲)에게는 당상관 벼슬을 주었다. 손자 여(礪)는 선전관(宣傳官)을 제수하고 제주도의 변장(邊將)에 임명하였다. 제주도 목장의 하나인 산마장(山馬場)을 감독하는 감목관 직책을 특별히 정하여 경주 김씨 집안에서 대대로 세습하도록 특혜를 베풀었다. 당시 관영 목장인 관둔(官屯)을 관리하는 직책인 감목관은 판관과 현감이 겸임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10소장의 관둔은 3수령이 겸임하지만, 산마장만은 김만일 집안의 감목관에게 감독권을 주도록 예외 조치가 취해진 것이다.
따라서 수령들과는 달리 김만일 집안의 감목관은 ‘산마 감목관’이라는 명칭으로 수여되었으며 관할하게 된 산장은 침장(針場)[마늘 오름 일대], 녹산장(鹿山場)[교래리 일대], 상장(上場)[마장 일대]으로 이루어진 매우 넓은 지역이었다. 주된 사무처인 관(館)은 산장 지대 안에 있는 교래리에 설치되었고, 140여명의 목자(牧者)와 중간 관리자인 수십 명의 마감(馬監)·군두(群頭)·군부(群副)를 통솔하게 된 것이다. 초대 감목관으로는 김만일의 셋째 아들 대길(大吉)이 임명되었으며, 그 뒤 집안사람들 가운데 적당한 인물을 6년마다 한 번씩 문중회의에서 정의 현감과 의논해 추천하면 정부가 그를 감목관으로 임명하였다. 이 때문에 지역 주민들은 이를 두고 흔히 세습제라고 불러왔다.
[김만일 집안의 헌마와 정치 역량]
김만일은 왜 많은 말을 그것도 여러 차례에 걸쳐 조정에 바쳤을까? 물론 국왕이 말을 바치라고 한 명령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료에 나타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왕이 명령보다 훨씬 많은 말을 적극적으로 바쳤다. 그 결과 경제적 지위에 걸맞는 정치적인 힘과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김만일은 말을 바침으로써 상으로 관직을 제수받았고, 이어서 산마 감목관직을 아들과 손자, 그리고 집안사람들이 대대로 세습하게 됨으로써 경주 김씨 가문의 제주도 내에서 지배층으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다지게 되었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육지로 말을 판매하는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대체로 좋은 말 한 필이 노비 3명, 또는 포목 50동(同)에 해당할 정도로 높은 값이었다. 게다가 “제주 말은 그 값이 원래 비싼 데다가 나주(羅州)에 오게 되면 이미 한 곱이 되고, 다른 도에 가면 또 한 곱을 더하므로, 사람들이 사기 어렵다”[『문종실록』 권7 문종 1년 5월 기해]는 지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주 높은 상품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 때문에 말을 빼돌려 부를 축적하려는 목사와 현감, 또는 군관들의 횡포가 대단했었다. 목사들 중에는 민간에서 빼앗은 말을 중앙 고관들에게 뇌물로 바치는 자들도 많았다. 때때로 중앙에서 국영 목장의 관리 실태를 확인하라고 관리들이 파견되었는데, 이들 역시도 민간이 기르는 말을 함부로 빼앗으려는 횡포가 지방 관리 못지않게 심했다.
이런 상황은 김만일에게도 위협적이었다. 제주섬에 귀양 왔던 이건(李健)은 “좋은 말이 있으면 삼읍의 원님들이 다투어 빼앗아 가므로, 만일은 종자가 끊어질까 걱정되어 일부러 눈에 상처를 내 봉사가 되게 하거나, 병신을 만들어 잘 보존해 종마로 삼았다”[『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고 적고 있다. 나름대로 자구책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러나 좋은 말을 생산해도 권력자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면, 즉 제주도의 상황에서 부를 지키고 살아남는 길은 정부로부터 직접적인 보호를 받는 것이 최선이었다.
1618년(광해군 10) 점마(點馬)를 위해 파견한 경래관 양시헌(梁時獻)이 김만일과 아들 3명을 모두 잡아다가 형을 가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왕이 김만일 부자를 풀어 주고 오히려 양시헌을 처벌하였다. 아마도 말을 수탈하려다 벌어진 사건이라고 생각되는데, 이는 그만큼 왕이 김만일 집안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으며, 조정의 보호가 실제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당시 감목관이 종6품으로 현감과 같은 품계의 직책이었으니, 그 이상의 관직을 역임한 자가 거의 없었던 제주 지역 사회에서 그들이 갖는 사회적 위세는 대단했다. 적어도 조선 후기에 경주 김씨 집안만큼 높은 관직을 계속 이어 가며 수여받고 실제 업무를 수행한 집안은 제주도 내에서는 경주 김씨 말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김만일은 재산 가운데 상당 부분을 중앙에 바침으로써 자신은 물론 아들과 손자들까지 모두 관직을 수여받았고, 나아가 대대로 산마 감목관직을 집안에서 세습하도록 된 것은 지방 관리들의 수탈에서 벗어나 그 집안의 부의 기반인 말을 자유롭게 기를 수 있는 바탕이 된 것이었다.
경주 김씨 집안이 대대로 산마감목관을 이어 가며 담당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우여 곡절이 있었다. 1702년(숙종 28)에는 김만일 가문에서 세습하던 산마감목관직을 폐지하고 정의 현감이 겸임하도록 하였다. 그 이유는 자손 가운데 목졸(牧卒)을 가혹하게 부리다가 원망을 품은 자가 조정에 소장을 제출하였기 때문이었다. 하루아침에 세습직을 잃은 경주 김씨 집안에서는 기회를 엿보다가 1719년(숙종 45)에 김만일 가문의 후손 김세화(金世華)가 한양으로 올라가 신문고(申聞鼓)를 쳐서 호소하였다. 그 후 산마 감목관직은 다시 김만일 가문의 세습직으로 전환되었다. 1782년(정조 6)에는 문중 회의를 통해 적임자를 추천하는 방식을 바꾸어 제주 목사가 문중 사람 중에서 직접 임명하도록 했는데, 이는 수령권이 강화되면서 나온 조치였을 뿐, 세습직 자체를 폐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 뒤 1895년(고종 32) 폐지될 때까지 약 210년간 경주 김씨 문중에서 모두 83명이 산마감목관을 역임하였다.
김만일과 그의 후손들은 약 200여 년간 산마감목관을 역임하며 말 사육에 힘을 쏟아 제주마 육성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