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6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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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鹿潭磨崖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토평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백종진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백록담 정상 동쪽 암벽에 새겨진 글씨.
[개설]
조선 시대 제주에 왔던 목사(牧使)·어사(御使)·적객(謫客)들이 한라산 정상에 올라 한라산과 백록담을 대상으로 자연을 읊은 시와 등반을 기리기 위해 이름을 새긴 것들이다. 백록담 마애명은 서귀포시 토평동인 백록담 동쪽 암반과 동쪽 꼭대기 암벽에 있다.
[형태]
1. 시각(詩刻)
① 임관주의 5언 절구
망망창해활(茫茫滄海闊) 아득히 널려진 한바다에
일권한라부(一拳漢拏浮) 조막처럼 한라산이 떠 있는데
백록선인대(白鹿仙人待) 백록이 신선을 기다리는
금등상상두(今登上上頭) 상상두 꼭대기에 오늘 올랐네
정해추(丁亥秋) 1767년 가을 임관주(任觀周)
② 정이환의 5언 절구
동서남북해(東西南北海) 동서와 남북을 두른 바다에
삽탱일봉부(揷撑一峰浮) 꽂혀서 하늘 받친 봉우리 하나
독립건곤대(獨立乾坤大) 거대한 천지에 홀로 솟아서
거연최상두(居然最上頭) 움쩍도 하지 않는 최고의 절정
정이환신지(鄭履煥身之) 정해4월일(丁亥四月日) 1767년 4월
2.명각(名刻)
① 영조 때
임자삼월(壬子三月) 1732년 3월
조관빈(趙觀彬) 조관빈은
이대사헌언사(以大司憲言事) 대사헌으로 간언한 일 때문에
피적등차절정(被謫登此絶頂) 유배 왔다가 이 산의 정상에 올랐다.
② 영조 때
조영순(趙榮順) 조영순은
이부수찬언사(以副修撰言事) 부수찬으로 간언에 관한 일 때문에
피적계등차정(被謫繼登此頂) 유배 왔다가 이 산의 정상에 올랐다.
乙亥三月(을해3월) 1755년 3월
③ 정조 때
조정□(趙貞□) 조정□은
정유이전□(丁酉以前□) 정유년(1777)에 [전 정언으로 간언한 일 때문에]
피적경술□(被謫庚戌□) 귀양 와서 경술년(1790)(에 풀려났다.)
은피하토심공락수이순무어사래휼 은혜가 벼슬자리에 물러난 선비에게 미쳐
(恩被遐土沈公樂洙以巡撫御史來恤) 심낙수 공이 순무어사로 왔다 갔다.
갑인춘(甲寅春) 1794년 봄에
⑤ 정조 때
이양정(李養鼎) 이형묵(李亨黙) 나동선(羅東善)
⑥ 순조 때
조정x(趙貞□) 조정철
정유이전x(丁酉以前x) 정유년(1777)
피적경술(월)x(被謫庚戌(月)x) 귀양왔다가 경술년(1790)
조정(철)(趙貞(喆)) 조정철
신미이방□(辛未以防□) 신미년(1811)에 방어사로
사(계)등절(정)(使(繼)登絶(頂)) 정상에 다시 이어서 올랐다.
[현황]
백록담 마애명은 지난 1999년 제주도청과 제주동양문화연구소가 조사할 당시 마애명이 새겨진 암반이 백록담 아래로 떨어졌음을 추측케 하는 여러 장의 마애명 사진 자료가 있었는데, 한라산연구소에 의하면 지난 2006년 5월 19일 자연적 현상으로 동릉의 암반 일부가 백록담 안쪽으로 무너졌다고 한다. 이처럼 백록담의 마애명은 풍화에 의한 마멸보다 암반의 붕괴로 인한 멸실이 가장 큰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조속한 시일 내에 백록담의 마애명 전체를 조사하고 그 보존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의의와 평가]
제주는 예로부터 신선의 고장으로 불려왔고, 한라산은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 중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으로 여겨져 왔다. 한라산의 정상에 있는 백록담은 신선이 타고 다니는 백록과 관련된 전설로 이름 붙여진 곳이기도 하다. 또한 백록담 정상은 인간의 장수를 관장하는 노인성(老人星)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예로부터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백록담이 있는 한라산의 정상을 오르려 하여 왔다. 백록담 마애명은 이러한 옛 사람들의 자취를 돌아보게 하는 1차적 사료로서, 세계자연유산 속에 묻혀있는 인문적 요소를 일깨우는 소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