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6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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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靈泉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상효동 1077|1078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현문필 |
소재지 | 영천관 터 - 서귀포시 상효동 1077번지 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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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관아건물 터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상효동에 있는 조선시대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되던 관아건물 터.
[개설]
영천관은 지방관이나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정의현과 대정현을 왕래하거나 국영목장의 목마를 점검 할 때 숙소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영천관의 위치에 대해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8권 정의현 누정(樓亭)조에 “영천관은 영천천(靈泉川) 서쪽 언덕에 있어 영천사(靈泉寺)와 동서로 서로 마주하였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변천]
영천관은 1466년(세조 12) 제주목사 이유의(李由義)에 의해 매년 봄·가을에 말을 점검하기 위해 정의현 영천에 건립되었다. 이후 제주목사 김흠조(金欽祖)에 의해 1525년(중종 20)에는 정의현성을 옮길 후보지로 영천관 일대가 거론되기도 했다. 이처럼 영천관은 당시 정의현의 행정관할에 있어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다.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耽羅志)』[1653년]에는 영천관이 폐지된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정확한 폐지 시점은 알 수 없다.
[위치]
서귀포시 상효동 돈내코 입구의 상효교 영천 북동편 농로를 따라 400m 정도 내려가면 영천악 남편 자락의 상효동 1077번지 일대 평탄대지 위에 있다.
[현황]
영천관이 자리했던 곳의 남서편은 영천이 흐르고 북편에는 감귤과수원 및 하우스 시설이 조성되었다. 그 사이 대략 2,000㎡의 평지가 영천관 터인데, 영천의 범람으로 인한 토사 유입과 조경수 식재 등으로 원지형이 교란된 상태여서 건물지의 흔적을 발견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이곳의 지표상에서 기와, 도자기 파편이 발견되고 있어서 과거 건축물이 존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기와는 무문(無文)·수지문(樹枝文)·청해파문(靑海波文) 등의 평기와 조각들이고, 도자기는 분청사기·백자·도기 등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 유물들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들로써 영천관의 존립시기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의의와 평가]
영천관은 조선시대 서귀포시 지역에서 가장 빠른 시기에 건립된 관아건물로, 조선 전·중기 정의현과 대정현의 행정 및 관리 체제를 밝히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영천관의 존재를 알리는 안내표지판을 세울 필요가 있으며,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