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7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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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衣貴國民學校四三遺跡址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장윤식 |
조성|건립 시기/일시 | 1948년 12월 26일 - 4·3 사건으로 제2연대 1대대 2중대 의귀국민학교에 주둔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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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49년 1월 20일 - 4·3 사건으로 의귀국민학교에 주둔했던 제2연대 1대대 2중대 철수 |
현 소재지 | 의귀국민학교 4·3 유적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1483-3번지 |
성격 | 4·3사건 유적지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의귀초등학교에 위치한 4·3유적.
[개설]
제주4·3사건 당시 각급 학교는 군부대 혹은 응원경찰의 주둔지로 많이 활용됐다. 1941년 간이학교로 출발해 1943년 정식 학교로 승격한 의귀국민학교에도 1948년 12월 26일부터 1949년 1월 20일까지 제2연대 1대대 2중대가 주둔했었다.
실제 2중대원으로 이 곳에 근무했었던 이윤의 『진중일기』에 따르면 1대대 2중대는 1948년 12월 16일 제주에 들어와 12월 26일 이 곳 의귀리에 주둔을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또 2중대는 학교 주변에 4개의 초소를 세우고 옥상에는 기관포를 설치했으며 주위에는 모래 가마니로 바리케이트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토벌이 본격화되면서 이들은 매일같이 주변 수색에 나섰고 마을 주변의 숲이나 궤에 숨어 있는 주민들을 발견하면 즉시 총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부상을 입거나 사로잡힌 주민들을 붙들어 와 학교 건물에 수용했다. 또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소문을 들은 이 일대 중산간 마을 주민들이 2중대로 귀순하여 수용됐다.
가족들과 은신생활을 하다 붙잡혀 이 곳에 수용됐었던 고성호[남, 04년 72세] 씨는 “군인들은 교실에 주둔했고 주민들은 학교 뒤편 창고에 수감했다. 상당히 많은 주민들이 수감됐었다.”고 말했다. 이들 주민을 구출하려고 했는지 몰라도 1949년 1월 12일 무장대로부터 습격을 받아 4명의 전사자를 내기도 했다. 무장대는 이보다 훨씬 많은 피해를 입었다. 주둔부대 군인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국민학교에 수용됐던 주민 수십 명을 집단 총살했다.
『진중일기』에 의하면 이들 군인들은 무장대 습격 직후인 1월 20일 이 곳에서 철수하여 태흥리로 이동했다고 한다.
[현황]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1483-3번지에 있으며, 남조로를 따라 의귀리에 들어서 한남리 방면으로 50m 들어서면 의귀국민학교가 있다. 지금은 당시 학교가 있던 자리에 의귀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하지만 건물도 여러 번 증개축을 한 상태여서 당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