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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남머리 4·3 유적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772
한자 -四三遺蹟址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윤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소남머리 4·3 유적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동 지도보기
성격 제주 4·3유적지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동에 위치한 4·3유적지.

[개설]

제주4·3사건 당시 서귀리는 서귀면뿐만 아니라 제주도 한라산 남쪽지역의 중심지였다. 면사무소와 남제주군청이 있었고 서귀포경찰서서귀리에 있었다. 때문에 토벌이 강화되면서 토벌대의 주요 근거지가 되어 대대본부가 위치해 있었고, 취조를 담당하는 정보과[대대2과]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서귀포경찰서서귀리에 있어서 대부분 혐의자 및 중산간 초토화 이후 야산을 헤매던 피난민들이 붙잡히면 이 곳 군부대에서 취조당하고 처형되었다. 군부대의 수용소에는 수감자로 넘쳐났다. 특히 군부대 정보과에서 산간에 피신한 주민들을 붙들거나 조그만 혐의를 내걸어 붙잡아 온 주민들을 고문 취조했던 농회창고는 악명이 높았던 곳이다.

즉, 당시 면사무소에는 군부대가 주둔했고 그 옆 창고에는 주민들을 수감시켜 취조를 하고 대부분 총살장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이때 취조 받은 주민들 중 즉결처형 대상자들 대부분을 처형했던 일상적인 주민학살터가 된 곳이 정방폭포 상단과 이어지는 ‘소남머리’다. 소남머리는 동산에 소나무가 많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흔히 4·3사건 당시 정방폭포에서 희생당했다고 하는 희생자 대부분이 이곳에서 학살당했다.

이곳에선 서귀리 및 서귀면 일대의 주민뿐만 아니라 남원면 의귀·수망·한남리 주민과 중문면, 멀리 안덕면 동광리 주민 등 산남지역 전체에 이를 정도로 많은 주민희생이 있었다. 특히 당시 대동청년단들로 하여금 창으로 찔러 죽이라고 하는 등 학살은 광기를 띠고 있었다.

당시 서귀중학교 학생이었던 송세종[남, 2003년 71세] 씨는 “그 때 당시 어디 여자인지는 모르지만, 도망가다가 절벽으로 떨어졌는데 나무에 걸렸어. 그 여자가 임신을 하고 있었지. 떨어지니까 군인들이, 이건 하늘이 도운 사람이라 해가지고. 그러니까 사람 두 번 죽인다는 것이 없으니까. 나도 직접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이라 회고했다.

[현황]

이곳은 당시의 지형과 별 차이 없이 옛터가 남아 있다. 정방폭포 등 절벽을 이루는 서귀포 해안의 특성 때문에 특별히 개발 흔적도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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