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7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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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駐屯所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호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장윤식 |
조성|건립 시기/일시 | 1949년 - 시오름주돈소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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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시오름주둔소 - 서귀포시 서호동 산 1번지 일대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호리에 있는 제주 4·3 사건 유적.
[개설]
제주 4·3 사건은 1949년 3월 제주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유재흥]의 귀순작전 등으로 무장대 세력은 급속히 약화된다. 또한 6월 무장대 총책임자 이덕구가 피살되면서 무장대는 궤멸상태에 이른다.
하지만 잔여 무장대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주민납치 등으로 세력을 불려나갔고 마을습격 등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에 제주도경찰국은 토벌대의 침식해결과 무장대와 주민들간의 연결을 차단하기 위해 제주도 산간 곳곳에 주둔소를 설치한다. 이 주둔소는 한국전쟁 발발 이전부터 무장대의 활동을 제한하고 효율적인 토벌을 위해 각 경찰서별로 설치하기 시작했는데 1952년 4월에는 전도에 32개의 주둔소가 있었다. 주둔소는 마을주민을 동원하여 석축을 쌓고, 경찰 1명과 마을청년 5~6명이 상주하며 경계를 했으며, 토벌대 60명이 동시에 취침 및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주둔소도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잔여무장대의 활동이 왕성해지자 제주도경찰국은 적극적인 무장대 섬멸계획을 세우고 1952년 11월 4개부대로 구성된 500여 명 규모의 ‘100전투사령부’를 창설했다. 시오름주둔소는 ‘100전투사령부’의 주요한 거점이 되었다.
[건립 경위]
시오름주둔소는 경찰주둔소로 1949년 초반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시오름주둔소 성은 서호리 주민뿐만 아니라 호근리·강정리·법환리 등지의 주민이 총동원되어 한 달 만에 쌓았다. 추운 날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상태에서의 동원은 주민들을 매우 힘들게 했다.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주둔소 성 안에는 경찰 1명과 마을청년 5~6명이 상주하며 보초를 섰다. 성 안에는 초가집 한 채가 있었는데, 이곳에는 식사를 준비하는 마을 부녀자들이 살았다. 또한 토벌을 다니는 군인들이 임시숙소로 사용할 수 있도록 30명 이상이 잘 수 있는 마루방도 있었다.
경찰은 빈약한 무기와 인원을 위장하기 위해 보초를 서지 않는 보초막을 여러 개 만들기도 했다. 또한 열악한 보급 때문에 주둔경찰의 부식마련 등을 위해 주민들이 겪는 고충도 많았다.
[위치]
서귀포시 서호동 산 1번지 일대에 있으며 서귀포시 서호동 고군산과 시오름의 중간쯤 목장 지역 안에 있는 돌로 쌓았다.
[형태]
삼각형 모양의 주둔소는 한 면의 길이 40여m, 전체 둘레 120m 정도이며, 높이는 약 3m, 폭은 1m 정도로 단단하게 쌓아져 있다. 성벽에는 군데군데 총구를 들이 댈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다. 삼각형의 각 모서리에 세워진 보초막은 둘레가 약 6m 정도이다.
[현황]
일부 성담이 허물어 진 곳도 있으나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있다. 또한 주둔소 안에는 당시 토벌대와 민간인 협조원이 잠을 잤던 숙소터도 큰 규모로 남아 있다. 성담의 흔적은 잘 남아 있으나 소나무와 잡풀로 뒤덮여 있다.
[의의와 평가]
원형이 잘 남아 있는 4·3 유적으로, 보존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