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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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臣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집필자 | 송문기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지역에서 전통 시대에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한 신하.
[개설]
충(忠)은 효(孝)와 더불어 유가 윤리의 핵심으로, 자기 자신 및 특정 대상에 대하여 정성을 다한다는 뜻으로, 이는 개인 윤리에서 출발하여 사회와 국가의 영역으로 범위가 확대된 개념이다.
충은 국가를 위한 윤리라고 할 때, 수많은 충의지사와 애국지사들이 한 행동은 군주 한 개인에 대한 희생이 아니라 국가 질서의 대통을 유지하고 그 상징적인 존재로서의 왕(王)을 존숭했던 것이다. 충은 일정한 공동 집단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내용]
읍지 인물조에는 충신·효자·열녀·명환·과환(科宦) 등을 이름·자호(子號)·가문·관직·경력·성품 등을 기술하고 있는데, 제주와 관련된 사찬·관찬읍지에서는 충신에 대한 기록을 찾기 어렵고, 또 범주화하기도 쉽지 않다. 『제주선현지』를 중심으로 서귀포시 지역의 충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만일(金萬鎰)[1550~1632]은 전마(戰馬) 충당을 위해 양마 5백필을 헌상하였는데 1629년 그 공을 인정받아 숭정대부에 제수되었다. 또한 그의 아들 김대길(金大吉)과 김대명(金大鳴) 역시 양마 2백 필씩 헌마(獻馬)하였다.
오흥태(吳興泰)[1700~?]는 성산읍 난산리 출신으로,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제주 삼읍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으고자 하였다. 1794년(정조 18) 이 일을 제주 어사 심낙수가 별단(別單)을 올려 아뢰자 정문을 내려주었다.
강성익(康聖翊)[1748~1820]은 지평으로서 제주의 구휼 문제를 적극적으로 진달하였고, 1804년 고향 성산읍 삼달리에 돌아와 임금의 은혜를 그리면서 헌수단(獻壽壇)을 세웠다.
대정 현감을 역임한 고창빈(高昌彬)[1778~미상]은 굶는 백성을 위한 선정을 다하였다.
한편, 대정 육의사(六義士)가 유명한데, 대정현 번천(樊川)[지금의 화순]의 양위경(梁渭慶)[1787~1852], 대정현 사계리 출신의 구제국(具濟國)[1766~1831], 송익하(宋益河)·강상훈(姜尙勛)·고한일(高漢日)·박필기(朴弼基) 등은 1812년(순조 12)에 평안도에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근왕병을 모집하였다
유명록(柳命祿)은 대정현 사계리 출신으로 1840년(헌종 6) 영국 함선이 가파도와 모슬포 일대를 무력으로 강점하자 격문을 돌려 의용군을 모집하고자 하였다.
오좌수(五座首)는 1887년(고종 2) 8월 일본 어선 8척이 가파도에 무단으로 정박하고 모슬포항에서 횡포를 일삼자 이에 항거한 이만송(李晩松)·이흥복(李興福)·김성만(金成萬)·정종무(鄭宗武)·김성일(金成鎰)을 말한다. 관에서는 이들의 용기를 포상하여 좌수(座首)의 직을 주었다.
김만석(金萬石)은 1907년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되자, 의병장 고승천(高升天)[일명 고사훈(高仕訓)] 등과 대정 지역에서 모병 활동을 하였는데, 이 해 3월 일본 경찰에 붙잡혀 대정읍 안성리 외곽에서 총살당했다. 가족이 없는 김만석은 안성리 주민들에 의해 가매장 되었다가 1977년 제주시 모충사로 이장되었고,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