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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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正喜 |
이칭/별칭 | 원춘(元春),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재형 |
출생 시기/일시 | 1786년 - 김정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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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19년 - 김정희 식년시 병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36년 - 김정희 병조 참판, 성균관 대사성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840년 - 김정희 대정현에 유배 |
몰년 시기/일시 | 1856년 10월 10일 - 김정희 사망 |
출생지 | 김정희 출생지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8번지 |
유배|이배지 | 김정희 유배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
유배|이배지 | 김정희 유배지 - 함경도 북청 |
묘소|단소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
유물전시관 | 제주 추사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
성격 | 유배인 |
성별 | 남 |
본관 | 경주 |
대표 관직|경력 | 병조참판, 성균관대사성 |
[정의]
조선 후기 대정현[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유배된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등 500여종에 이른다. 1786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문인 경주 김씨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훈척가문으로 아버지는 병조판서를 지낸 김노경(金魯敬)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영조의 둘째딸인 화순옹주와 혼인하여 영조의 사위가 된 김한신이다.
[활동 사항]
김정희는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충청우도 암행어사·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참판·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김정희는 1826년 충청우도 암행어사 시절 비인 현감인 김우명을 봉고 파직한 일이 있었는데, 1830년 김우명이 추사의 아버지인 김노경을 ‘윤상도(尹商度)의 옥사’로 탄핵하여 김노경이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김노경은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김정희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840년(헌종 6)에 김우명이 10년전의 윤상도(尹尙度)의 옥사를 거론하여 또 다시 이미 사망한 김노경과 김정희를 탄핵함에 따라 김정희는 대정현에 유배되었다. 김정희는 화북포로 제주도에 들어온 후 대정현 안성리에 유배되어 포교 송계순의 집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강도순의 집[오늘날의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으로 옮겼다.
김정희는 유배생활을 하며 가족과 친구들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는데 특히 아내에게는 반찬을 보내달라는 내용과 제주도 날씨와 맞지 않아서 몸이 항상 아프다는 내용이 많았다.
유배생활 중에도 쉬지 않고 붓을 잡아 그리고 쓰는 일에 매진하였다.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호]를 이 시기에 그렸고, 필체가 서투른듯하면서도 맑고 고아한 것을 특징으로 하는 추사체도 이때 완성되었다. 특히 「세한도」는 김정희의 최고 걸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이라 평가받는 그림으로 1844년 그의 나이 59세에 수제자인 이상적이 유배지로 찾아오자 「세한도」를 그려 주면서 “날이 차가워진 연휴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는 공자의 글을 발문에 적은 것은 유명하다.
김정희는 대정현 유배중 이시형·강사공·박혜백·이한우·김구오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대정향교에 ‘의문당(疑問堂)’이라는 현판도 써주었다.
김정희는 1848년(헌종 14)에 유배가 풀렸다가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이후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의 관악산 아래 살면서 근처의 봉은사 승려들과 교유하며 만년을 보내다 1856년 10월 10일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시(詩)·서(書)·화(畵) 모두에 뛰어났으며 비석에 쓰여진 명문을 연구하는 금석학(金石學)에도 일가(一家)을 이루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세한도」를 비롯하여 「모질도」·「부작란(不作蘭)」 등의 회화 작품과 「의문당(疑問堂)」·「다산초당(茶山草堂)」·「무량수각(無量壽閣)」 등의 현판글씨를 남겼고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 등의 금석학 관련 저술과 『완당집(阮堂集)』·『완당척독(阮堂尺牘)』·『담연재시고(覃硏齋詩藁)』 등의 문집이 있다.
[묘소]
김정희의 묘소는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정희가 유배생활을 했던 강도순의 집은 국가지정 사적 제487호로 지정되어 있고 그 곳에 추사 유물전시관인 '제주 추사관'이 2010년 새롭게 개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