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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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應天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웅철 |
출생 시기/일시 | 1887년 - 박응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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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8년 12월 - 박응천 의병에 참여, 전라남도 나주에서 일본군 헌병대 감독보조원 처단 |
활동 시기/일시 | 1917년 7월 - 박응천 의병 활동으로 징역 12년 확정 판결 받음 |
출생지 | 박응천 출생지 - 전라남도 나주군 왕곡면 구천리 2124번지 |
거주|이주지 | 박응천 이주지 - 남제주군 대정면 하모리 920번지 |
활동지 | 박응천 의병 활동지 - 전라남도 나주 |
성격 | 항일의병|항일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전라남도 나주에서 의병 활동 |
[정의]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거주한 항일 의병.
[활동사항]
박응천(朴應天)은 1887년 전라남도 나주군 왕곡면 구천리 2124번지에서 박문홍(朴文弘)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8~1909년에 일제에게 강제로 을사조약을 당한 통분으로 전라남도 나주에서 봉기한 의병장 권택(權澤)의 휘하에서 항일 운동을 하였다. 1908년 12월 전라남도 나주군 영산포의 이순흥(李順興)이 당시 영산포 일본군 헌병대에 감독보조원이었던 김형규(金炯珪)의 꼬임에 빠져 나주에서 봉기한 의병들을 일본군 헌병대에 밀고하였다. 이에 격분한 박응천은 동지 곽재구(郭在九)·박행순(朴行順)과 함께 김형규를 산중으로 유인하여 사살하였다. 또한 나주군 왕곡면 교읍리의 악덕 친일파 김봉오(金奉五)를 붙잡아다가 응징한 죄목으로 관헌에 체포되었다.
이들에게는 당시 「조선형사령(朝鮮刑事令)」에 의해 곽재구에게는 징역 15년, 박응천·박행순에게는 각각 징역 12년의 중형이 선고되었다. 수감 생활을 하면서 선고에 불복하고 상고하였으나 1917년 7월 대구 복심법원에서 원심 확정판결을 받았다.
옥고를 치른 다음 1941년 6월 대정면 하모리 920번지로 이주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항일 의지를 고취시키면서 굳건한 국가관과 애국심을 전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