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9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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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邊太祐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웅철 |
출생 시기/일시 | 1899년 - 변태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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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3년 - 변태우 모슬포에 보창의원 개원 |
활동 시기/일시 | 1937년 - 변태우 한지의사 시험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940년 10월 - 변태우 국방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 투옥됨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 변태우 광주에서 월산의원 개원 |
몰년 시기/일시 | 1950년 - 변태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3년 - 변태우 건국포장 추서 |
출생지 | 변태우 출생지 -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933번지 |
거주|이주지 | 변태우 이주지 - 제주시 제주읍 이도리 1429번지 |
거주|이주지 | 변태우 이주지 - 광주광역시 |
성격 | 항일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보창의원 원장|모슬포금융조합 이사 |
[정의]
일제 강점기 제주도 서귀포 출신의 의사, 항일운동가.
[개설]
변태우(邊太祐)는 제주도 내 천주교 사제들과 함께 항일운동을 하였으며, 의사로서 인술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모슬포금융조합을 잘 이끌어 지역민들이 일제 강점기에 생활 경제를 실천하도록 계몽했던 항일운동가이다.
[가계]
변태우(邊太祐)[1899~1950]의 본관은 원주(原州)로 아버지는 변양근이다. 1899년 대정읍 하모리 933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족이 제주읍 이도리 1429번지로 이주하여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천주교제주성당[현 제주중앙성당]의 신도가 되었다.
[활동 사항]
변태우는 1922년 의생이던 장한규(張漢奎)의 차녀와 혼인을 계기로 의사가 되기로 하고, 이듬해 의생시험에 합격한 뒤 모슬포로 옮겨와 보창의원(普昌醫院)을 개원하였다. 일제의 「의료법 시행령」에 따라 1937년에 한지의사(限地醫師) 시험에 합격하여, 대정면 일원을 담당하는 의사로 활동하였다.
가파도 신유의숙 설립자이자 독립운동가인 회을(悔乙) 김성숙(金成淑)이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에서 귀국한 후, 한 때 모슬포에 머물렀는데, 이때 변태우는 김성숙과 교유하면서 항일 독립 정신 고취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김성숙이 속칭 하모리 돈재 길에서 자전거를 잘 못 탄다고 내리막길에서 소리지르며 일본인 순사를 자전거로 들이받아 시궁창으로 빠뜨려 버린 적이 있었다. 이때 변태우가 운영하는 의원에서 일본인 순사를 치료해 줌으로써 위기를 넘기게 되었고. 이러한 인연으로 김성숙과 사이가 긴밀해졌다.
1938년부터 일본군 대본영은 중국 대륙에 가장 접근하기 쉬운 도양폭격기지(渡洋爆擊基地)로 모슬포 알뜨르를 설정하고, 1개 비행단 이상 규모를 운영할 수 있는 대규모 해군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하고, 겸하여 그곳을 항공훈련 기지로 활용하려 했다. 그해 가을 제주성당 다와슨 패트릭(Dawason Patrick)[한글 이름 손신부] 신부가 모슬포로 변태우를 찾아와서 모슬포 알뜨르비행장의 규모와 총면적, 주둔 병력수, 항공기의 대수, 방어 시설 등을 묻자 아는 바대로 설명해주었다.
이와 관련하여 변태우는 1940년 10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와 함께 외국인 신부 세명과 한국인 신도 10여명을 기소하였는데 그 중 이기순은 재판 직전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중에서 사망하기도 하였다. 변태우은 1942년 10월24일 광주지법에서 국방보안법과 군기보호법 위반으로 징역1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생존방편으로 불가피하게 이와다[岩田富丞]라는 일본 이름을 쓰기도 했던 그는 1932년부터 모슬포금융조합에 이사 등 임원으로 일하며 주민들의 경제적 권익보호에 기여하기도 했다.
변태우는 광복 이후 전라남도 광산군 대촌면 보건소장으로 발령을 받고 광주로 거처를 옮겼다. 1948년부터 광주 시내에 월산의원을 개원, 운영하던 중 옥고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1950년에 광주 자택에서 숨졌다.
[상훈과 추모]
1993년 광복절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