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1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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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遇伯 |
이칭/별칭 | 강오백(姜五百)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찬식 |
[정의]
1901년 제주 민란[신축 민란] 당시 민군의 대장.
[개설]
1901년 제주 민란은 토착 신앙이 전통 종교였던 제주도 민중들의 외래 종교인 천주교에 대한 반감, 제주도 경제권을 둘러싼 토호 세력과 중앙에서 파송한 봉세관과의 갈등 등이 원인이었다. 1901년 1월 봉세관 강봉헌(姜鳳憲)이 세금 징수로 민중들을 착취할 때, 천주교 신자인 최형순(崔亨淳)이 실무를 맡은 것이 사건의 시작이 되었다. 제주도 출신 대정군수 채구석(蔡龜錫)은 토착 세력을 규합하여 봉세관과 천주교인들을 공격하였으며, 결국 천주교인 300여 명이 살해되는 등 많은 사상자를 내 신축교난(辛丑敎亂)으로도 불린다.
[가계]
일명 강오백(姜五百)으로서, 대정군 하원리에서 출생하였지만 주로 인근 월평리에서 거주하였다. 아버지는 강시양(姜時陽)으로 장의(掌議)를 지냈다.
[활동 사항]
강우백(姜遇伯)은 1901년 민란 당시에 월평리 이강(里綱)과 상무사 사원을 맡을 만큼 향촌 사회의 유력한 지위에 있는 자였다. 또한 강우백은 1898년 대정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하였던 방성칠(房星七)의 난에 주도 인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강우백은 1901년 5월 초 민란이 일어났을 때 서부 지역 장두 오대현(吳大鉉)과 더불어 동부 지역의 장두로 나섰다. 강우백 등 동부 지역 민란 지도부는 정의군 우면 호근리·법환리의 이강 등을 위협하여 마을마다 남정 백 명씩 이끌고 나오게 하였다. 5월 14일 천주 교회 측이 민회소(民會所)를 공격하여 서부 지역 장두였던 오대현을 비롯한 6명의 민회 주도자가 체포되자 서부 지역 장두로 나선 이재수(李在秀)와 더불어 민군을 지휘하였다. 민군은 제주성까지 진격하여 천주교인을 살해하였다.
민란이 진정된 후 6월 9일 찰리사 황기연이 도착하자 강우백은 민란의 장두인 이재수·오대현 등과 함께 옥에 갇혔다. 7월 13일 민란 주동자와 함께 서울로 호송되어 7월 27일부터 평리원에서 재판이 치러졌다. 10월 9일 최종 판결이 내려져 다음 날인 10월 10일 교수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