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3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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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鋪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창소리 |
시대 |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문경호 |
관할 지역 | 포창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창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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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조선시대에 충청남도 예산 지역에서 강이나 바다의 포구에 임시로 조세를 보관하던 창고 또는 임시 시설.
[개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조창에는 각각 수세 구역이라 불리는 조세 징수 구역이 정해져 있어 해당 지역의 조세를 한곳에 모았다가 수도로 운송하였다. 조창이 설치되기 전이나 조운제도가 기능을 상실한 시기에는 포창이라 불리는 곳에서 조창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이 경우 포창은 조창보다 수가 더 많았고, 창고를 갖춘 곳과 갖추지 않은 곳이 혼재하여 있었다.
[관련 기록]
예산 지역 포창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 식화지 조운조에 “이섭포(利涉浦)[옛 명칭은 갈성포(葛城浦)로 예산현에 있다]는 13석 운반에 운임이 1석이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호두포는 예산현 관아로부터 북쪽으로 15리[약 5.89㎞] 떨어진 곳에 있는데, 옛날에는 이섭포라고 불렀고, 무한성천의 하류에 있다. 그 아래로 더 내려가면 돈곶포가 나온다.”, “예산의 해창은 호두포에 있다. 대흥, 청양의 해창도 이곳에 있다.” 등이 있다.
[내용]
고려시대 예산에는 이섭포라는 포창이 있어 예산과 주변 지역의 조세를 모아 개경으로 보냈으나 인근 아산 지역에 하양창이 설치되면서 이섭포는 기능을 상실하였다. 조선 초에 예산 지역은 면천의 범근내포에 조세를 납부하다가 아산에 공세곶창이 설치되면서 아산으로 조세를 운송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군현별로 해창을 설치하여 조세를 운송하게 되면서 예산 지역에도 해창이 건립되었다.
조선시대 예산의 해창은 호두포 즉, 무한천의 하류인 예산읍 창소리에 있었다. 『대동지지』의 예산 창고조에는 예산의 해창과 대흥, 청양의 해창이 모두 호두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해창이 포창이라고도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여지도서(輿地圖書)』의 지도에 예산현의 포창, 청양포창, 대흥포창 등이 호두포 남쪽에 나란히 그려진 것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변천]
고려시대에는 이섭포, 조선시대에는 호두포라고 불린 곳은 지금의 예산군 예산읍 창소리 일대로 추정된다. 현재에도 창소리에는 창촌, 창말, 창뜸 등의 조창 관련 지명과 공세포라는 포창 관련 지명이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고려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특정 지역이 지속적으로 포창의 역할을 한 곳은 많지 않다. 이는 예산 지역이 일찍부터 해로 교통이 발달하여 운송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근거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