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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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수원부 양지현(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사람으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의 사후인 1823년(순조 32) 예조에서 각 식년(式年)에 서울과 외방에서 충(忠)·효(孝)·열(烈)에 대해 장계(狀啓)로 의정부에 보고한 것을 등급을 나누어 시행한 일이 있었다. 이때 그는 서울에 사는 고(故) 첨지 최상유, 개성부의 고(故) 사인(士人)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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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출신의 효자. 상촌(桑村)에서 자수성가하였으며 평소에 아버지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였다. 1950년 6·25 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피란하였으나 늙은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고향에 남았다. 김동현은 비행기가 마을을 폭격하자 아버지를 업고 안전한 곳으로 피란하여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 다른 집들은 폭격을 당하여 대부분 큰 피해를 입었으나 그 집만 무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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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용인 출신의 효자. 김상술은 편모 슬하에서 몹시 가난하게 살았으나 효행이 특출하여 늘 노모에게 고깃국을 끓여드리기 위하여 나무와 숯을 구워 용인 장에 내다 팔았다. 대대리에서 용인 장까지는 왕복 30여리가 훨씬 넘었는데, 어느 날 숯을 지고 장에 나와 늦도록 팔지 못하다가 저녁때가 다 되어서 겨우 팔았다. 김상술은 서둘러서 고기 한 근을 사 가지고 지게 꼭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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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용인 출신의 효자. 김상익은 향리에서 글방을 차려 훈장을 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좌수의 직책을 맡아 향치에 힘썼다. 평소 효심이 두터웠기로 마을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러던 중 부친이 병을 얻어 자리에 눕자 몸소 탕약을 끓여 간병하였고, 천수를 다하자 멸성지정(滅性之情)으로 애도하였다. 예에 어긋남이 없이 장례를 마친 후 3년의 거상 중에 하루도 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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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용인현령을 역임한 문신이자 효자.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이옥(爾玉), 호는 경호(耕湖). 김새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살았으며, 슬퍼함이 형언할 수 없었다. 그의 효행에 하늘도 감복하였다. 이를 테면, 제사를 지낼 음식이 다 떨어지면 꿩이 부엌으로 날아들었고, 사슴 한 마리는 묘 옆을 지키며 사람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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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거주의 문신이자 효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석여(錫汝), 호는 연농(硏農)이다.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여 용인현 수여 남동에서 거주하였다. 집안은 가난하였지만 어버이를 봉양하는데 소홀함이 없이 항상 곁에서 모시고 입에 맞는 음식과 계절에 어울리는 옷을 준비하는 데 온갖 정성을 다하여 용인현에서 이름난 효자였다. 1859년(철종 10) 사마시에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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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수원부 양지현(현재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에서 살던 선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1806년(순조 6) 각 지역 유생의 건의에 따라 예조에서 왕에게 효자를 보고하였는데, 이때 증직(贈職)의 특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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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용인 출신의 효자. 김유는 도적들이 밤에 칼을 들고 집안에 침입하여 그 어머니를 찌르려 하자 맨 몸으로 달려들어 대신 죽었다. 그의 아내와 딸 역시 그 뒤를 이어 따라 죽었으나, 어머니는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이 일이 임금님께 전해지자 효·열 3개의 정려(旌閭)가 내려졌다고 전하나, 읍지에 기록만 있을 뿐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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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김해. 자는 수보. 아버지는 진사 김구(金龜)이다. 김집은 가난하였지만 부모를 섬기는 일에 성심을 다하였다. 어머니가 병환을 앓자 변을 맛보아 징험하고 엉킨 머리에서 이가 떠나게 하였다. 어머니가 꿩을 먹고 싶다고 하자 부엌에 들어가 꿩을 잡았고, 아버지가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자 얼음을 깨고 이를 구해 공양했다. 마침내 상을 당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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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의성. 자는 수지(綏之), 호는 졸암(拙庵). 어려서부터 부모를 섬기는 도를 잘 알고 시행하였으며, 극진하고 성실하게 부모를 공경하였다.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백방으로 간병하였으나 효험이 없었다. 간절히 기도하던 중 어느 날 탁발승이 나타나 비방을 알려 주었는데 이는 참으로 구하기 힘든 약이었다. 전전긍긍 애태우던 중 부인이 이유를 묻자 “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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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남동에서 출생한 효자. 본관은 전주이며 자(字)는 자직(子直)이고 부친은 류무(柳懋)이다. 1716년 용인 지역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병환으로 누어있을 때 소변, 대변을 보아드리며 지극 정성으로 병 구환을 하면서 천지신명에게 고통을 대신하여 달라고 빌었다. 부친이 돌아가자 예를 다하여 상을 치르고 효를 다하지 못함을 죄스럽게 생각하고 1736년 스스로 목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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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허환(虛患)으로 병석에 누운 아버지를 온갖 정성을 다해 돌보았으나 효험이 없었다. 이에 한 의원이 고기를 먹어야 나을 병이라고 조언하니, 추운 겨울에 폭설을 무릅쓰고 개울에 나가 얼음을 깨고 물 속에서 가물치 7마리를 잡아다 탕약을 해드려 낫게 하였다. 어머니가 병으로 고생하였을 때는 백방으로 영약을 구하였고,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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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1771년(영조 47) 과거에 급제하였다. 통덕랑(通德郞)에 올랐으나 모친께서 병으로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어 병을 돌보는 데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약재를 구하여 탕약을 해드렸다. 병세가 위독해진 뒤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리니 수명이 조금 연장되었다. 돌아가신 후에는 졸곡(卒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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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송명천은 양지현(현재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에서 출생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여 주변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경기관찰사가 조정에 아뢰어 교생(校生)으로 있을 때인 1822년(순조 22) 11월 5일에 조세와 부역을 면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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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야성. 자는 희주(希周). 양지현(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에서 출생하여 천성이 지효하였다. 부친이 생존해 계실 때에는 조석으로 문안하고 겨울에는 행여 방이 찰세라 군불을 지펴 따뜻하게 하였으며, 하인을 시키지 않고 반드시 손수 하였다. 부친의 환우 중에는 험한 고개를 넘어 20여 리나 되는 다른 동네에 피접처를 정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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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순흥(順興). 아버지는 함흥군수를 지낸 안익(安翼)이다. 용인에서 출생하여 승사랑(承仕郞)을 지냈고, 어렸을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릴 적 과천(果川)에 살았을 때, 부친이 병으로 고생하자 몸소 병구완에 전념하였다.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한강에 나가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드렸고, 산천에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상(喪)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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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문약(文若). 안희묵(安羲黙)[1795~1881]은 수원부 양지현(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에서 출생하였다. 안희묵은 어려서부터 품행이 단정하고 학업에 열중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뜻에 어긋남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병이 들어 위독할 때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들게 하는 효행을 보였으며, 상을 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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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여중(汝中). 고려 후기의 성리학자 안향(安珦)의 21세손이다. 안희중(安禧重)[1728~1800]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1743년(영조 19) 6월 그믐날 밤 폭우가 쏟아져 사당이 무너지려 하였으나 부모님은 모두 병석에 누워 있었다. 당시 16세였던 안희중은 급히 사당으로 뛰어 들어가 대들보를 붙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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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선보(善甫). 아버지는 소문난 효자인 어진혁이다. 집안의 전통을 이어받아 『소학(小學)』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고 학업에 열중하였는데, 아버지가 병으로 6년 동안 고생하자 간병하는 일에 전심하여 과거도 보지 않았다. 마음은 물론 행동도 조심하면서 병구완에 힘썼지만, 마침내 상을 당하자 3년동안 시묘하면서 죽으로만 연명하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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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공소(孔昭). 할아버지는 어진혁(魚震赫)이고 아버지는 어사량(魚史良)이다. 어운해(魚運海)[1750~?]는 집안의 전통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효도를 다하였다. 아버지 어사량이 등창으로 병석에 있을 때 입으로 고름을 빨아 낫게 하였다.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한겨울에 대추가 먹고 싶다고 하자 눈 속에서 대추를 구해 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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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경백(驚百). 양숙공(襄肅公) 어세공(魚世恭)의 후손으로, 아들은 어사량(魚史良), 손자는 어운해(魚運海)이다. 어진혁(魚震赫)[1684~?]은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의 병세가 위중하자 목욕재계하고 냇가에 가서 얼음을 깨고 3일 동안 기도를 하였더니 잉어가 스스로 뛰어올라 왔다. 그 잉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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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용인 출신의 효자. 용인현(龍仁縣)에 거주하던 부모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6년 동안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형과 형수 또한 일찍 죽자 6명의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대하였으며, 격식을 갖추어 2명의 조카를 성혼(成婚)시켰다. 1432년(세종 14) 9월 13일 예조에서 김효량(金孝良)·전좌명(田佐命) 등 전국 각처의 효자·열부 등의 정표를 청할 때 오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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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계운(啓運). 아버지는 이기남(李起南)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 부인은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이계복은 어려서부터 어버이 섬기는 것을 지성으로 하여, 부모님이 병이 들면 항상 변을 맛보아 병세를 짐작하였으며 자신이 대신 아프게 해 달라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아버지가 학질에 걸렸을 때, 어떤 이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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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의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조선 정종(定宗)의 열 번째 아들 덕천군(德泉君)의 10세손으로 아버지는 좌승지 이진하(李鎭夏)이다. 이규헌(李奎獻)[1669~1731]은 1705년(숙종 31)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아버지가 병을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낙향하여 병간호에 전념하였다. 한겨울 아버지가 잉어찜이 먹고 싶다고 하자 20리나 떨어진 곳을 찾아가 잉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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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용인 출신의 효자. 이맹석은 조선 세종 대에 경기도 용인현에 살았다. 할아버지 이도을(李都乙)이 서울에서 죽었는데, 이맹석의 아버지가 종기가 심해 거의 죽게 되어 장례를 치르지 못하였다. 그러자 이맹석이 아버지를 대신해 예의에 맞게 염(殮)하고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무덤 앞에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 후 부모가 사망하자 이맹석은 몸소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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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효자. 『순조실록』 1824년(순조 24) 3월 19일 기사에 예조에서 유생의 상언을 접수한 뒤 임금에게 효자 용인의 고(故) 학생(學生) 이송연에게 정려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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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통덕랑 이승진(李升鎭)은 용인 출신으로 효행이 뛰어나서 1817년(순조 23) 3월에 예조에서 정려(旌閭)할 것을 허락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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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정종(定宗)의 열째 아들인 덕천군(德泉君)의 11세손이며, 원종공신(原從功臣) 이기헌(李基獻)과 효자 이규헌(李奎獻)의 조카이다. 이원복은 연로한 아버지를 정성으로 보필하였다.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를 위해 늘 곁에서 시중들었을 뿐 아니라, 길을 갈 때는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고 업고 다녔다. 아버지의 상을 당한 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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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우봉(牛峯). 아버지는 참의(參議) 이유겸(李有謙)이고, 동생은 의병 이령(李翎)이다. 이핵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집안이 모두 강화도(江華島)로 피난을 가고 자신은 의병에 입대하였으나, 혼자 남은 모친을 두고 떠날 수 없어 모시고 있었다. 이듬해 광성진(廣城鎭)에 주둔하던 동생 이령과 함께 갑곶진(甲串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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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에 무덤이 있는 효자.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여고(汝固). 아버지는 이각(李珏)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慶州金氏) 김한윤(金漢胤)의 딸이다. 부인은 전의이씨(全義李氏) 이응회(李應會)의 딸이다. 이호정은 순조 대에서 고종 대까지 살았던 효자로 본래 보령(현재의 충청북도 보은군) 출신이나 용인의 노곡(老谷)으로 이사하였다. 근검하고 근면하게 생활하여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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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덕수. 자는 필만(必萬). 어모장군(禦侮將軍) 이치(李穉)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다는 칭송을 들으며 자란 이희동(李喜東)[1663~?]은 어머니가 위독하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간병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했다. 밤마다 목욕재계하고 기도드린 지 백 일째 되던 날 밤, 신선이 꿈에 나타나서 이희동에게 묘방을 일러 주었다. 그러나 신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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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정선현(丁善顯)은 효성이 지극하여, 1871년(고종 8)에 효자로 정려(旌閭)를 받았다. 효자 정문이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전대리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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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용인 출신의 효자. 조선 선조 때 출생하였고, 관직은 전력부위(展力副尉)에 올랐다. 부친이 병을 얻었을 때 동짓달에 생대추가 먹고 싶다고 하자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흘리며 축원하였더니 이튿날 아침에 생대추가 붉기 시작하였고, 또 꿩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찾아 가는 길에 꿩의 무리 중 한 마리가 높이 날아 올라갔다가 그 앞에 떨어졌다.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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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자는 경모(敬模). 아버지는 정재위(丁載渭)이고, 부인은 해주오씨(海州吳氏)이다. 효자였던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받은 정의현(丁義顯)[1794~?]은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정성스레 모셨고, 상을 당한 뒤에는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탈상 후에도 성묘를 거르지 않았다. 정의현은 홍수가 나 성묘하기 어렵게 되자 큰나무로 개울을 막아 물을 얕게 만든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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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자는 우문(遇文). 아버지는 정지대(丁志大)이다. 정재위는 효행으로 칭송을 받았으며, 자손을 엄격히 훈도하여 효행의 가통을 세운 인물이다. 아버지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추운 겨울에 얼음을 깨고 물속에 들어가 고기를 잡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약초를 캐는 등 정성을 다하였으며, 아침저녁으로 자신의 목숨으로 아버지를 대신하기를 기도하였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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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출신의 효자.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윤칠(允七), 호는 모은(慕隱). 포은 정몽주의 18세손이고, 아버지는 정구현(鄭九鉉)이다. 정한영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발랐으며, 유가의 법도에 따른 특출한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정한영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관직은 종사랑과 감리서주사(監理署主事)를 지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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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백인(白仁), 호는 소암(素庵). 충신으로 정려된 최잠(崔潛)의 후손이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위독할 때는 대변을 맛보기도 하고, 자신을 대신 죽게 해달라고 목욕재계하고 기도하였다. 아버지가 목숨이 위태로울 때에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시게 하여 목숨을 연명하게 하였다. 또 어머니가 위독하자 정성을 다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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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효자. 본관은 광주. 호는 학도당(學道堂)이다. 고려 말기인 1376년에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태어났는데, 다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죽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철이 들자마자 어머니까지 죽자, 부모를 합장한 후 6년 동안 상복을 입은 채 시묘살이를 하면서, 나물밥에 물만 마시며 향기로운 음식과 과일을 먹지 않았다. 또한 손수 제사 음식을 만들어 지성으로 제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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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용인 출신의 효자. 한신은 세종대에 양지현(陽智縣)에 살면서 사랑과 공경을 다해 부모를 섬겨 효자로 이름이 났다. 아버지가 죽자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면서 하루 세 번 음식 공양하기를 삼 년 동안 멈추지 않았다. 지극한 효성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1431년(세종 13)에 예조에서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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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의 열녀. 공중노(孔重魯)의 처 홍씨는 18세기 중반에 용인에서 살았던 열녀이다.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는데, 병으로 돌아가시려는 시부모를 위해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흘려 넣어 살리려 하였다가 결국 그로 인해 파상풍에 걸려 죽게 되었다. 1741년(영조 17)에 열녀로 명정(銘旌)되었으나 열녀문은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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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효부. 본관은 순흥(順興). 남편은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석기(權錫器)이다. 안씨는 어려서부터 부모에 효도하였으며, 결혼 후에도 가난한 생계를 삯바느질과 길쌈 등으로 꾸렸고, 1857년(철종 8) 남편이 죽은 뒤에도 더욱 정성을 다하여 시부모를 공경하여 귀감이 되었다. 1872년(고종 9)에 효부·열녀로 정려(旌閭)되었다. 정려문이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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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열녀. 본관은 온양. 아버지는 정돈지(鄭敦之)이고, 남편은 서흥김씨(瑞興金氏) 통덕랑 김배(金培)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이천(利川)의 거마산으로 피난하였으나 청군(淸軍)이 추격하여 왔다. 이에 욕을 면키 어렵고 그 몸이 더렵혀질까 두려워 두 딸과 함께 연못으로 투신하여 정절을 지켰다. 지금도 이천 자래동에 세 무덤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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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용인의 열부. 본관은 남양. 홍락원(洪落源)의 딸로 태어났다. 김해김씨(金海金氏) 김집(金鏶)의 손자 김상동(金相東)의 처이다. 남편이 병을 얻어 지성으로 간병했으나 자리에 누운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남편의 죽음에도 슬픔을 내색하지 않고 늙은 시모를 위안하고 진정시키기에 애를 썼다. 망부를 장례하는 일에 소홀함이 없도록 수의를 손수 마르고 꿰매어 입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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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의 열부. 본관은 상주(尙州). 부사를 지낸 황탁(黃鐸)의 딸로, 김치복의 아들 통덕랑(通德郞) 김수로(金洙老)의 처이다. 사주단자로 혼약을 맺었던 김수로가 불행히 요절하자 부음을 듣고 생전에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약혼자의 초상을 치르기 위하여 소복으로 삿갓가마를 타고 시댁을 찾았다. 3년 동안 상을 치르며 하루 세 번씩 상식을 올리고 3년 마지막 탈상 때 파제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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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효부. 본관은 안동(安東). 통덕랑 권재응(權載應)의 딸이며, 동몽교관으로 추증된 의성김씨 김유성(金維城)의 처이다. 의성김씨 가문은 김치복과 그의 며느리 황씨, 손부(孫婦) 조씨 등 3세에 걸쳐 정려를 받은 가문으로 증손부 권씨가 정려문을 받음으로써 4세에 걸쳐 효자·효부·열녀의 정려를 받은 가문이 되었다. 병환이 위중한 시아버지를 위해 남편과 함께 3일간 기도를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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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의 열녀. 본관은 연안. 아버지는 이형원, 남편은 박래영이다. 1785년(정조 9)에 출생하여 16세 때에 박래영과 결혼하였다. 그때 시어머니는 이미 작고하였고, 홀시아버지는 병환으로 문밖출입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7년 동안 극진히 간병하였으나 마침내 세상을 떠났고, 병약하던 남편마저 24세 되던 해인 1809년(순조 9)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멸성지정으로 애통하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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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의 열녀. 본관은 함열(咸悅). 남편은 안재복(安載復)이다. 14세에 원삼면 맹리 안재복에게 출가하여 시부모를 공경하였고, 길쌈과 방적으로 가세를 일으켰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게 남편이 병으로 쓰러지자 약을 달여 극진히 간병하였고, 3년 거상 중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저녁 상식을 올려 애통해하다 탈상을 한 뒤 곡기를 끊고 남편의 뒤를 따랐다. 남궁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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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의 열녀. 박씨 여인은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홀로 살았는데 이웃에 사는 박삼봉이란 자가 밤중에 침입하여 박씨를 겁탈하려 하였다. 이에 박씨는 몸을 빼어 도망하였다가 간수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관찰사 이재학이 이러한 사실을 장계로 아뢰니 풍덕김씨 여인의 예대로 정려하고 박삼봉은 추관(秋官)으로 하여금 신문하여 형벌을 내리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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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의 효부. 일찍이 남편 유봉학을 여의고 가세가 몹시 곤궁하였으나 시부모를 극진히 섬겨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낮에는 밭을 매고 밤에는 길쌈을 하여 끼니를 이었으며, 와병중인 시아버지의 탕제를 백방으로 구하여 병을 간호하였다. 마침내 시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그 애절함이 지극하였다. 오씨의 효성에 감복한 향당에서 해주오씨 효부비를 세웠으며, 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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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용인 지역의 열부. 강화최씨는 완산인(完山人) 이선양(李善養)의 처이다. 남편이 역질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자 최씨는 갖가지 약과 비방으로 간호하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산신에게 기도하고 피접도 해 보았으나 병세는 악화되어 운명 직전에 이르렀다. 이때 최씨는 손가락을 잘라 수혈도 하였지만 남편은 끝내 운명하였다. 친지들이 모여 시신을 거둘 때 남편이 사용하던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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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용인 출신의 열부. 본관은 용인(龍仁). 이인수(李仁壽)의 딸로 죽창(竹窓) 이시직(李時稷)과 혼인하였다. 이시직의 처 이씨는 선조 대의 열부로 천품이 지효하여 시부모 봉양에 온갖 정성을 기울였고, 자녀의 교육은 법도에 어긋남이 없이 엄격하게 하였다. 병자호란 때 그의 남편 이시직(李時稷)이 강화도에서 송시영(宋時榮)과 함께 자결을 하여 종복이 망건과 유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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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의 열녀. 용인 사람 정인빈(鄭寅賓)의 아내로 남편이 병이 들자 정성을 다해 간호했으며, 남편이 죽자 8일간 식음을 전폐하여 결국 세상을 떠났다. 1753년(영조 29) 조정에서 이 일을 높이 사 이씨를 열녀로 표정하였다. 1753년(영조 29) 열녀로 표정(表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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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인의 효부. 밀양박씨는 차성태와 혼인한 이후, 시아버지가 병이 들자 끼니마다 수저로 떠서 드리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수발을 들었다. 20여 년을 한결같은 모습으로 효를 행하자 인근에서 효부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밀양박씨의 효성을 치하하며 세운 비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에 있다. 1934년 6월, 용인의 기로친목회에서 비를 세워 밀양박씨의 효성을 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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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지역의 열녀. 김소사의 행실은 18세기 중엽에 간행된 『용인현 읍지』의 「충효열인」편에 수록되었다. 여기서 소사는 과부의 높임말이다. 용인현리(龍仁縣吏) 최재관(崔在寬)의 처이다. 김소사는 남편과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다. 그러나 남편이 일찍 죽자 그 딸을 정성스럽게 키워서 출가시키고, 그 날 밤 극약을 먹고 남편의 뒤를 따라 죽었다. 이 일이 조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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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부부인. 본관은 풍양(豊壤). 아버지는 성균관 생원 조귀중(趙貴中)이며, 어머니는 청주한씨(淸州韓氏) 장령 한진(韓縝)의 딸이다. 남편은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有重)이다. 1676년에 딸이 숙종의 계비가 되자 외명부(外命婦) 정1품 부부인(府夫人)이 되었다. 1689년에 일어난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인현왕후가 폐비되자 삭탈관직당했으나 1694년 갑술옥사(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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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용인의 열부. 본관은 함양(咸陽). 아버지는 박장춘(朴長春)이며, 남편은 청주한씨(淸州韓氏) 한용주(韓用疇)이다. 박씨(朴氏)[1436~1449]는 열네 살 때 용인에 사는 한용주에게 출가하였으나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남편이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였다. 박씨는 온갖 정성을 다하여 간병하였으나 효험이 없었다. 이듬해 1월 남편의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충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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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용인 출신의 충노(忠奴). 피무작금의 성(姓)은 피(皮), 이름은 무작금(蕪作今)이다. 진사 정시익(鄭時翼)의 종으로 죽산도호부 근삼면 외초동(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장평리)에서 살았다. 정시익이 여덟 살 무렵 피무작금은 목천(木川)에 있는 여동생 집에 심부름을 가 있었다. 이때 정시익의 부모가 전염병에 걸려 모두 죽자, 이웃들은 병을 두려워하여 감히 돌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