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347
한자 -南延君墓盜掘事件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5-28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임선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68년 5월연표보기 - 오페르트 남연군묘도굴사건 발생
발생|시작 장소 남연군묘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5-28 지도보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오페르트|젠킨스|페롱|흥선대원군

[정의]

1868년(고종 5) 충청남도 예산 지역 덕산의 가야산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오페르트가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

[개설]

독일인 오페르트(Ernest Jacob Oppert, 戴拔)[1832~1903]는 1866년(고종 3)에 두 차례 조선으로 항해하여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자, 1868년에 미국 상인 젠킨스(Frederick Henry Barry Jenkins), 프랑스 선교사 페롱(Stanislas Féron)[1827~?] 등과 함께 덕산의 가야산 자락에 있는 남연군(南延君)의 묘[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를 도굴하여 이를 빌미로 조선과 통상하고자 하였다. 오페르트 일행은 본선을 행담도에 정박시킨 후 작은 선박을 이용하여 구만포를 통해 남연군묘에 이르렀으나, 바닷물의 퇴조 시간과 묘지의 견고함 등으로 인해 도굴에 실패하고 물러갔다. 이로 인해 조선의 천주교 박해와 쇄국은 더욱 강화되었다.

[역사적 배경]

1836년(헌종 2)에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남연군 이구(李球)의 무덤은 처음에 경기도 마전에 있다가, 연천 남송정(南松亭)에 있던 부인 여흥민씨의 묘에 합장되었다. 그런데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은 덕산(德山) 대덕사(大德寺)의 탑이 있는 자리가 큰 길지라는 지관의 말을 믿고,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우선 1845년에 충청도 덕산의 가야산(伽倻山) 자락으로 이장했다가, 다시 1846년(헌종 12) 3월 18일에 가야산 중간 기슭의 언덕으로 천장하였다. 이하응은 이곳에 있던 대덕사 주지를 돈 1만 냥으로 매수하여 절을 불태우고 승려를 내보낸 후, 지관이 정해 준 혈자리의 탑을 헐고, 암반인 그곳에 관을 묻은 뒤, 수만 근의 쇠를 녹여 붓고 흙으로 덮었다. 이장한 지 17년 후인 1863년 12월에 흥선군의 차남 이명복이 고종으로 등극하였고, 이하응은 흥선대원군이 되었다.

오페르트는 독일 함부르크의 부유한 유태인 은행가 집안 출신이다. 1861년부터 홍콩, 상해, 일본에서 무역업에 종사하였으며, 조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세 차례 조선을 항해하였다. 우선 1866년 2월[음력]에 영국인 모리슨(James Morrison, 馬力勝)과 함께 영국 상선 로나(Rona)호에 동승하여 충청도 평신진(平薪鎭)의 조도(鳥島) 앞바다, 해미현(海美縣)의 조금진(調琴津)에 정박하여 조선 관리에게 통상을 요구하였다. 1866년 7월[음력]에는 엠퍼러(Emperor)호를 마련해서 중국의 상해를 출발하여 흑산도-아산만-덕적도를 거친 후 강화도를 탐사하였는데, 이때 월곶진(月串津)에 정박하여 조선 관리에게 통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국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통상 수교 요청을 거부하였다. 1868년에는 세 번째 항해를 통해 충청도 아산만 덕산군에 상륙해서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고 관을 꺼내 이를 빌미로 흥선대원군과 협상하려고 시도하였다.

[경과]

오페르트의 세 번째 조선 항해는 1868년(고종 5) 음력 4월[양력 6월]에 있었다. 일행으로는 미국 상인 젠킨스 병인사옥 때 조선을 탈출하여서 병인양요 때 프랑스 로즈(Pierre-Gustave Roze) 제독이 이끄는 조선원정대의 길 안내 역할을 했던 프랑스 선교사 페롱과 조선에서 천주교 박해를 피해 중국의 상해, 연태 등으로 도망가 있던 천주교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남연군묘 도굴은 페롱이 제안하였고, 젠킨스가 비용을 부담하였으며, 오페르트가 총책이었다.

오페르트 일행은 1,000톤급 기선 차이나(China)호와 얕은 물에서도 항해할 수 있는 작은 배 그레타(Greta)호를 이끌고 4월 30일 중국 상해를 출발하여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5월 10일에 행담도에 도착하였다. 5월 11일 새벽에 젠킨스와 선장 모러(Moeller)는 차이나호에 남고 나머지 전원은 오페르트의 지휘하에 군복과 소총으로 무장한 후 그레타호와 탈취한 2척의 한국 선박에 나누어 타고 행담도를 출발하여 12일 10시경에 덕산의 구만포에 상륙하였다. 그곳에서 오페르트는 러시아 사람이라고 지칭하면서 관청을 습격해서 무기를 탈취하였다. 그 과정에서 조선 관군 및 백성과 무력 충돌이 있었다.

우세한 화력으로 조선인을 제압한 오페르트 일당은 오후 5시경 가야산 기슭의 남연군묘에 도착하여 도굴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예정보다 4시간이나 늦게 묘소에 도착했을 뿐만 아니라, 묘지 구덩이가 견고한 돌로 덮여 있는 관계로 바닷물의 퇴조시간에 쫓기어 도굴에 실패하였다. 그들은 구만포로 돌아가 다시 그레타호 등을 타고 행담도에 정박해 있던 본선 차이나호로 돌아갔다.

한편, 군청과 무기고를 습격 받은 덕산군수 이종신은 즉각 충청도관찰사 민치상에게 보고하였고, 충청도관찰사는 영장 조의철로 하여금 즉시 출동하여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영장이 100여 명의 군인을 이끌고 현장에 출동했을 때에는 오페르트 등이 돌아간 뒤였다.

[결과]

남연군묘 도굴에 실패한 오페르트 일당은 1868년 5월 13일에 영종도에 정박하여 흥선대원군에게 통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무력으로 대응하겠다는 협박의 서신을 보냈다. 이에 대해 흥선대원군은 영종부첨사 명의로 보낸 답신에서 남연군묘 도굴을 비판하면서 위청척사를 정당화하고, 침략 협박에 굴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의의와 평가]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 사건으로 오페르트남연군묘를 도굴한 침략자 모습으로 남게 되었으며, 젠킨스는 미국인에게 고발당하였고, 페롱 신부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소환을 당했다. 또한 조선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쇄국 정책을 강화하고 천주교를 탄압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오페르트남연군묘 도굴 사건을 포함한 세 차례의 조선 항해 경험을 중심으로 조선의 지리, 인종, 정치, 역사, 풍속, 관습, 종교, 언어와 문자, 상공업에 관해서 다룬 『금단의 나라 조선기행』을 1880년에 독일어와 영어로 동시에 출판하였다. 『금단의 나라 조선기행』은 초기 서구 열강이 조선을 이해하는 지침서 중 하나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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