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8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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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九鎔 |
이칭/별칭 | 정구용(鄭龜龍)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한금순 |
출생 시기/일시 | 1880년 10월 5일 - 정구용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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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3년 - 정구용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으로 체포, 투옥됨 |
몰년 시기/일시 | 1941년 5월 5일 - 정구용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2년 - 정구용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정구용 출생지 - 경상북도 영일군 동해면 대동배동 399 |
활동지 | 정구용 활동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 산1번지 |
추모각 | 의열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 산1번지 |
성격 | 항일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 |
[정의]
1918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 지역의 법정사 항일 운동에서 활약한 항일 운동가.
[개설]
1918년 법정사 항일 운동은 일제강점기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독립운동 중 최초이자 최대의 무장 항일 운동이다. 법정사의 승려들을 중심으로, 신도들과 인근마을 주민 등 700여명의 시위대는 사전 치밀한 준비를 거쳐 1918년 10월 7일 일본인을 제주에서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목적을 내걸고 곤봉과 화승총 등으로 무장하여, 도순리 법정사에서 출발하여 중문리까지 진출하였다. 시위대는 전선과 전신주를 잘라 통신을 끊고, 경찰관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일본인을 집단 구타하는 등 일제에 조직적으로 저항하였다.
정구용(鄭九鎔)은 법정사 승려로 항일 운동의 격문을 작성하는 등 이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항일 운동가로, 당시에는 체포되지 아니하고 숨어 지내다가 나중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가계]
1880년 경북 영일군 동해면 대동배동 399에서 출생하였고, 아버지는 정극서(鄭克瑞), 어머니는 이여형(李汝馨), 아들은 정창문이 있다.
[활동 사항]
정구용은 경상북도 경주의 기림사에 있다가 제주도 출신의 방동화의 권유로 김연일과 함께 제주도에 들어와 1914년경부터 법정사에서 활동하였다. 정구용은 법정사 신도들에게 항일 의식을 심어주었으며 1918년 제주 법정사 항일 운동의 격문을 작성하고 주민을 독려하여 참여시키는데 앞장섰다.
정구용이 쓴 격문은 ‘독립을 위해 일본인 관리와 상인을 쫓아내야하겠으니 사람을 모아서 집합하라’는 요지이다. 이 격문을 마을에 배포하며 주민을 독려하여 참여를 주도하였다. 정구용은 현장에서 체포되지 아니하여 궐석 재판으로 소요 및 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았는데 4년 4개월여의 은신 끝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구용은 경상북도 일대에서도 항일 운동을 지속하여 그의 업적이 포항시 송라면 보경사에 있는 ‘기미 3·1 독립의거 기념비’에도 기록되어 있다. 정구용은 의사이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구용은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에 있는 무오 법정사 항일 운동 발상지(戊午法井寺抗日運動發祥址)에 건립된 의열사에 영정이 모셔져 독립운동의 뜻이 기려지고 있다.